
은사스님은 반대했다. 그렇지만 서예를 배우고 싶은 꿈은 버려지지 않았다. 붓과 벼루만이라도 갖고 싶었다. 그때 나이 열여덟이었다. 절에 와서 주련을 하는 이가 글씨에 금을 올리는 모습은 찬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도니 붓과 벼루를 사다주겠다고 약속했다. 일년을 기다렸다. 그는 오지 않았고 열아홉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알던 한 신도를 찾아가 원을 말하니 여초 김응현 선생에게 데려다주었다. 은사스님이 불같이 호령을 치는데도 매일 같이 여초 선생을 만나러 다녔다. 그 걸음이 스물 일곱까지 이어졌다.
“이 글씨는 내 마음이에요. 글씨를 쓸 때든 그림을 그릴 때든 기도할 때와 같은 마음이지요. 나도 모르게 무심속에서흘러나와요.”
글씨가 꿈틀꿈틀 힘차게 움직여간다. 필력 없이는 나오지 않을 비백飛白과 굽이다. 글씨의 생김새나 손목의 힘만을 이야기하자면 필치가 좋다거나 필력이 넘친다고 할 테지만, 거기서 뻗쳐 나오는 기운을 말하자면 신필神筆, 운필運筆이라 해야겠다. 도력을 가진 스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니 말 그대로다. 실제로‘불佛’자에서 기의 파동이 뻗쳐 나온다고 했다. 작품에 불심을 담는 도일 스님의 원력이 깃든 것일 터. 붓을 드는 순간 무념의 상태가 느껴지니 선기禪氣가 느껴지는 것도 당연지사다.
“글씨쓸때가기도나참선을할때보다집중이잘돼요.”
손으로 붓을 들어 올리고 있으나 기도하는 듯하다. 붓에 먹물을 적시고 있으나 절을 하는 듯한 매무새다. 붓을 내리긋고 있으나 참선정진 중인 듯하다. 스님의 서예 수행을 엿보는 동안 나는 법당에 앉아 부처님을 대하는 듯 경건해진다. 그토록 밝은 수행의 기운이 깃드니 그냥 글씨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그러니 도일 스님의 글씨를 대하는 마음에 삼배 한다. 지난 4월, 조선일보미술관에서 13년 만에 전시회를 가졌다. 글씨와 그림을 전시하여, 열반에 든 은사스님이신 초안 스님의 뜻을 잇기로 했다. 석굴암은 6·25때 폐허가 된 것을 초안스님이 45년간 탁발 화주하여 불사해온 절이다. 그것을 이젠 도일 스님이 이어 도량확장불사를 하고 있는 것.
은사 스님을 추억하는 도일 스님의 눈가에 아련함과 그리움이 고인다.
“여기 머문지 33년째네요. 석굴암과의 인연은 전생부터 운명이었지 싶어요.”
동진출가했다. 누가 길을 인도한 것도 뜻을 둔 것도 아니었다. 물처럼 흘러흘러 닿은 곳이 부처님 앞이었다.
여덟 살에 집을 나왔다. 조실부모하고 큰집에 얹혀살다가 큰어머니 목소리만 들어도 몸이 벌벌 떨려 동네에서 동가식서가숙하다 어느 날은 마냥 걸어보기로 했다. 온통 논밭뿐이던 그 시절의 강남 자곡동에서 시작된 어린 걸음은 방향 없이 목적 없이 며칠을 흘러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서 닿은 곳이 성남. 또 얼마간을 헤매다가 아무 버스나 탔다. 동대문을 지나 구파발까지 닿았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1973년 정월, 그해 겨울의 배고픔과 추위는 온 몸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구두닦이가 남긴 자장면을 먹고 포장마차에서 버린 허연 연탄불 앞에서 몸을 녹였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니 경찰에게 잡혀 고아원에 갈 수도 있었을 테고 깡패들한테 걸릴 수도 있었을 테고 거지들 소굴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도 건들지 않았더란다.
“나한님이 날 부르고 있었는 가봐요.”
구파발에서 아이 하나를 마주쳤다. 아이는 스님의 점퍼를 입어 보자고 했다. 아이는 그걸 입더니달아나 버렸다. 아이를 쫓아 가다가 양주 방향길로 접어 들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아이가 나한님이었단다. 정처없이 걸어 고갯마루 넘다보니 캄캄한 밤이 왔다. 온길도 앞길도 캄캄하기만 했다. 버스에서 여인이 하나 내리더니 집으로 데리고 가 씻기고 먹이고 재웠다. 산문 밖으로 출타를 잘 하시지도 않는 초안 스님이 우연히 그 집에 들었단다. 스님은 머리를 쓰다듬으시더니 절로 올려 보내라 하셨단다. 그날로부터 33년을 석굴암에 머리 뉘이고 살고 있다. 정법을 수호하며 만행도 나가지 않았고 밖에서 잠을 청해 본적도 없다. 오로지 해인사 강원에서의 시간만이 석굴암 밖의 시간이다. 거기엔, 상좌로 두기 위해 출타를 금하는 은사스님의 뜻이 있기도 했다.
학교도 보내지 않고 엄하게만 키웠다. 고행을 통해 불법에만 정진하게 했다. 입산 후 12년의 행자시절을 마치고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하던 날 은사스님의 눈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대견했을 것이다.
해인사에서 첫 사진전을 할땐 은사스님이 관광버스 가득 신도들을 태우고 찾아왔다. 스물 일곱살에 해인사 강원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석굴암에서 수행만 하면 된다고 했던 분. 절 밖으로 나가는 걸 그리도 싫어하던, 방생 한번 성지 순례 한번 안갔던 분이 해인사까지 오셨다. 그 또한 대견해서 였을 것이다. 처음 사진을 시작했던 것도 열여섯 무렵이었다. 올림푸스 자동카메라 하나 갖고 있던 그에게 은사스님이 니콘 카메라를 내주셨다. 그랬으니 상좌의 사진전이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서부터 예능에 재능을 보였던 상좌에게 칭찬 한번하지 않았으나 끝내 해내고야 마는 열의를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도일 스님은 두 번의 천일기도를 마쳤다. 은사스님 돌아가신지 백일 되던 날 준비도 없이 그날 하던 일 다 끊고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는 슬픔이 가득차서 기도만 열심히 했다. 삼년 시묘사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다음 달엔 세 번째 천일기도에 들어간다. 석굴암에 1250 석불나한을 모시는 원을 세웠다. 이제 겨우 108 나한을 모셨으나 멀지 않은 일이라 여긴다.
스님이 문득 대금을 든다. 그리움에 젖거나 화가 들면 대금을 분다고 했다. 열아홉 때 가졌던 대금에 대한 꿈도 이제야 이뤘다. 그래서 스님은 재가자들 앞에서 곧잘 대금을 분다.
“음악은 재가자들과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요. 그야말로 대중불교입니다.”
글씨도 그림도 사진도 대금도 결국은 스님의 예능포교가 되고 있다. 그것을 대하는 이들에게 미의 감동과 함께 자연스레 불심을 심어주니. 석굴암 여름수련회는 도량에 텐트를 치고 진행되는데 참가한 아이들에게 대금으로 동요를 불어준다. 재작년엔 30여명의 아이들이 찾아왔었는데 작년엔 60여명의 아이들이 찾아왔다. 스님도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아이들도 스님을 붙잡고 떠날 줄 모른다.
“108명의 아이들을 키워보겠다는 원을 세웠어요. 그 중 10명의 아이들만이 스님이 된다 해도 기쁘겠어요.”
스님은 지금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이 아이들도 부처님께 귀의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자신의 유년을 돌아보며 어렵게 사는 아이들을 거두는 것이 운명이라 여긴다. 출가자들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늦은 나이의 출가가 많은 요즘, 스님은 이 아이들이 지금부터 불심을 키웠으면 한다. 부처님이 자신을 거뒀 듯이 이 아이들 또한 거둬줄 것이라 여기기에. 요즘, 스님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일에 처할 때마다 자신을 키워준 은사스님을 생각한다. 그래서 때때로 은사스님 처럼 엄하게 아이들을 대한다. 어른의 옳은 가르침이 그립다.
“3년에 한번은 전시를 할 것입니다. 인재 양성에 이바지할 생각이지요.”
스님은 근처의 부대와 자매결연도 맺었다. 종교를 떠나 자신의 염원으로 가사장삼을 하고 찾아가 군인들을 위해 반야심경을 독송해주기도 한다. 그들의 체육대회 때는 찾아가 대금을 불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마다 대중공양을 간다. 불자만 있는 것도 아닌데 군인들은 스님이 가면 좋아한다. 부처님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 스님도우리가까이에늘있다는것을몸소보여주는모습이다.
“난 대통령도 부럽지 않아요. 난 행복 속에 파묻혀 있거든요.”
사실 운명을 탓한 적도 있다.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도 있다. 열일곱에 석굴암에 처음 전기가 들어오자 녹음기가 생겼다. 은사스님이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틀어주셨는데 그걸 들으며 모든 미움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의 운명이 자신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았다.
“사랑은 한계가 있어요. ‘사랑’이란 말은 있어도 진짜 사랑은 없더군요. 말과 행동이 달라요. 그래서 난‘사랑’은좋아하지않아요. ‘자비慈悲’를좋아하지. 불법은이론과행동이맞아. 이론은이치가되고. 자비는 어머니와 자식 간의 말이에요. 아이가 울면 안아주고 업어 주고 젖을 주는 어머니, 그것이 바로 부처와 중생의 관계입니다. 중생의 원도 아이처럼 끝이 없지요. 그걸 다 껴안아 주는 분이 어머니 같은 부처님입니다. 자식의 죄도 대신 지어주는 분.”
자비,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가능하고 또 무궁무진한 말이다. 그것을 단박에 알게 만드는 스님의 일화를 하나 적는다. 어느 날, 시장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한 상점의 주인 여자가 걸레를 빤 물을 밖에 버린다는 게 그만 스님의 면상에 확 붓고 말았다. 도일 스님은 어떻게 했을까? 물을 툭툭 털고는 빙긋 웃고 가던 길을 갔다. 주인 여자는 두고두고 그 일이 미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스님의 자비, 곧 부처님의 자비를 몸소 깨달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 순간 스님이 언짢은 말을 건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녀는 뒤돌아서서 스님이 뭐 저리도 속 좁으냐며 욕을 했을 것이고, 그 욕은 곧 부처님을 향한 것이 됐을 것이다. 그러니 그 순간에 도일 스님은 자비를 베풀어 여인에게 불심을 심어준 것이다.
비가 그쳤다. 오봉산 다섯 개의 봉우리가 구름 속에서 빠져나온다. 스님 처소의 큰 창으로 저 아래 크고 굳센 산세가 한눈에 펼쳐져 보인다. 스님의 글씨처럼 힘을 품고 뻗어나가는 저 산은 이내 속세로 구부러진다. 부처님의 자비가 스님의 글씨를 타고 우리에게로 흘러들듯. 오후 나절엔 비백 같은 구름이 와선 비를 한껏 쏟았더랬다. 운무가 쓸려가더니 비에 젖던 숲은 어디 가고 햇살이 어미처럼 숲을 보듬어 안는다. 여기, 자비의 숲이다. 석굴암 도량이 그러하고 스님의 삶이 그러하니 우리의 삶도 그러하리라. 비도 해도 좋고 나쁨을 떠나왔다가는 것이니, 스님은 고통스러웠던 과거도 다 저 자비의 숲에 묻었을 것이니, 대통령도 부럽지 않은 것이리라. 맑아진 하늘에 큰 새 한 마리 날아가는지 새 그림자가 손 위에서 소리 없이 날아간다. 흔적은 없으나 새 날
아간 자리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우리 살아가는 흔적 같은 것이리라. 생각한다. 내 마음의 숲에 미움이란 벌레가 집을 지으려 하거들랑 석굴암에 와야겠다고. 도일 스님 글씨 앞에 앉아 자비를 품어야겠다고. 다시 폭우가 쏟아질 거란 일기예보가 들려 올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