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는 흐르고 싶어 한다. 기둥으로 서서 겪는 풍상이 한스러워서만
은 아니다. 흙에서 난 이들이 흙으로 돌아가듯 물을 먹고 자란 나무는
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것은 수구초심首邱初心이나 회귀 본능과는
다른 것으로 무의식 가운데 그려지는 영상과 같이 의지 분별없이 닮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고의 아픔이 있고 평화와 안식의 서정이 있다. 때론
슬픔과 절규와 같고 때로는 미묘한 환희와 같은 운율이 있다. 그것이 목
리木理이다. 나무의 꿈이 알알이 물결 져 온 몸에 물무늬를 짜 가는 소
리, 목리를 인식한 뒤에 혹시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여 밤에도
귀를 열어 놓는다. 운문 도량에 살며 더불어 사는 분들과, 도량과 자연
에 대한 고마움을 말로 다할 수 없지만 또 하나의 기쁨이 대웅전 신축
불사를 처음부터 지켜볼 수 있었던 점이다. 터를 닦고 지반을 다지는 기
초 공사에 이어 기둥이 서고 공포를 의지하며 사면이 짜여갈 때 사부대중이 마음으로 축원을 보내며 하나가
되어 동참하고 있었다. 지붕의 밑 손질은 참으로 오랫동안 계속되었는데 통나무를 끌어올리며 힘을 모으는
소리는 천오백 년 전 신라의 풍요風謠를 생각나게 하였다. 섬세하고 웅장한 건물 하나가 들어서는 데는 얼마
나 많은 일들이 있는지, 그 일들을 하나하나 해내며 천 년 가람을 단장하는 손끝은 겉보기에 허름한 늙은 목
수일 뿐이다. 쇠못 하나 치지 않고 짜 맞추어 이루어지는 목조 건물은 목리를 모르고선 아니 된다. 물의 성질
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 흐른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그것을 순리順理라고 한다. 어떤 글이든지 보기만 하면
문맥을 알고 요점을 잡아 훤히 아는 것을 의리意理라고 한다. 한문을 자꾸 읽어 아무리 어려운 구절도 막힘없
이 풀어가는 것을 문리文理가 났다고 하고, 또 나무의 겉피와 속피 사이 수액이 걸림 없이 오르내리는 물관을
문리文理라고 한다. 나무도 결과 질의 쓰임새가 서로 격이 맞아 제자리에 앉을 때 제 기량을 다하는 것이리
라. 자연의 생명체 속에 있는 불성과 장인의 기교, 곧 나무 자체의 결과 심결이 일체가 되어 또 다른 생명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목조 건축물이며 공예이다. 나무를 다루며 사는 이들의 삶도 그러하여 일단 계획한 일이
시작되면 청결한 마음으로 완성할 때까지 지극한 정성으로 일관한다. 내가 멀리서 바라본 그들에겐 눈 빠른
속임수나 경쟁심 같은 건 읽을 수 없었다. 무던하고 꾸준한 움직임이 있을 뿐이며 기교를 위한 꾸밈이 아닌
한치의오차도없는완결함이있을뿐이다. 일상속에서초월하려는의지보다는욕망과번뇌의삶속에서오
히려 자유로운 늙은 목수를 본다. 목리를 아는 자만이 갖는 안식일 것이다. 좀더 청빈하고 순결한 생활을 추
구하며 사는 이들을 많이 닮아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일에 임하는 그들의 자세가 기도처럼 진지하기 때문일 것
이다. 내리치는 한 번의 망치 소리가 수백 년의 시간을 허공에 고정시키는 작업임을 그가 알까? 일이 있는 곳
이면어디나마다않고평생을떠돌며살아온굳은손은이땅을지나가는수많은보살의유형가운데그들의
자리를 확인시켜 주는 셈이다. 잔일 하나로부터 전체의 삶으로 들어가는 문을 몸소 체달한 이의 무심함이 잔
잔한 눈빛에서 배어 나온다. 이제 나무는 한 곳에 오래 서서 흐를 수 있는 법을 알고 있다. 우리는 나무가 죽
어서 서 있다고 하지만 그가 향수해를 굽이돌아 새로운 생명으로 이 땅에 움을 틔우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러옹이를맺으며사는나무를통해진리를향해끊임없이흐르는내속의불성을알았고어머니를향해열려
있는 나의 사랑을 알았다. 기둥을 마주하고 앉아서 물을 보는 것, 물과 나무가 둘이 아닌 무언의 증거가 거기
에있다.□
영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