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 더라’라고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봄날은간다’라는제목의이노래는 울 엄마의 십팔번. 엄마의 노래 솜씨 는 백점짜리가 아니지만, 그 필(feel) 은 조용필이 부른 버전 못지않게 진 하다.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 면 따라 우는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 은 간다고 하는 노랫말이 문득 떠오 른 것은 며칠 전, 길에서였다. 봄볕 이나 쪼이려고 올라탄 시내버스가 신호에 묶여 압구정 어디에 서 있는 데, 창 밖으로 할머님 한 분이 지나 고 계셨다. 자줏빛 양말에 베이지색 단화, 꽃무늬가 은은한 감색 스커트 에 팥죽색 카디건을 걸치신 할머님 의 모습은 압구정동을 지나는 누구 보다 화사했고, 나처럼 봄볕에 겨워 나오신 듯 보였다. 나도 모르게 할머 님 발걸음을 눈으로 쫓고 있었는데, 할머님은 정거장에 핀 목련나무 아 래서 딱 멈춰 서셨다. 나는‘버스를 타시려나?’생각했는데, 할머님은 그 자리에 서서 목련꽃을 올려보실 뿐 이었다. 절정을 지나 꽃잎이 뚝뚝 지 기 시작하는 목련나무를 할머님은 한참 올려보고 계셨다. 버스는 출발 했고, 그 순간‘보옴 나알은 가아안 다~’하는소절이떠올랐다. 여자 예쁜 남자, 강한 여자가 인기를 모 으는 이 시대에도 구닥다리 내 취향 은‘여성스러운 것’에 머무른다. ‘여 성스럽다’라는 정의조차 그 경계가 모호한 세상에서 풍금처럼, 조선여 자처럼, 황진이처럼 살아가기란 쉽 지가 않다. 나는 서른이 넘은 유부녀 인데 아직도 까만 생머리를 길게 하 고 다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리 를 단단하게 조여서 하나로 묶었다 가 잠들기 전에 고무줄을 풀고 빗으 로 쓰다듬어 내리는 순간이 너무 행 복한 것도 한 이유다. (물론 빗은 해 남에서 장날에 산 참나무 얼레빗이 다.) 기자와 요리사로 만난 남편이 내게 반한 것은 밥을 볶는 나의 뒷모 습을 본 순간이라고 하는데, 나는 앞 꽃전 치마를 꽁꽁 처매고 쪼그려 앉아 요 리하는 것이 편타. 작은 손가방에는 거울이랑(트윈 케이크 파운데이션에 붙어 있는 거울이 아닌) 손수건을 갖 추어야 멋쟁이이고, 바지보다는 치 마를 입어서 걸음걸이가 좁아져야 여자답다고 생각한다. 나의‘여성스 러움 강박증’은 그 도가 지나쳐서 음 식촬영을 위해 예닐곱 시간을 서 있 어야 할 때에도 하이힐을 고집하고, 아무리 밥하기 싫은 날도 남편을 부 엌에 들이기 꺼려하는 부작용으로 돌아온다. 여성스러우면 이제 생활 이 불편해지는 시대가 온 것일까? 나같이 여성스러움에 집착하는 이들 은 비실용적인‘공주과科’로 뭉뚱그 려지거나 무성無性의시대에발맞추 지 못하는 낙오자로 치부된다. 그럼 에도불구하고내가고루한‘여성성’ 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뭘까? 바로 봄날이 가는지 오는지 느끼고 싶어 서다. 여자로서의 내가 피려고 할 때, 피고 있을 때, 꽃잎이 한 장 떨어 지기 시작할 때를 놓치기 싫어서라 면 누가 믿어줄까? 눈이 휙 돌아가 게 바쁜 한 세상, ‘인간’박재은이 아 닌‘여자’박재은으로 살면서 나의 사계四季를맛보고싶어서다. 화전 불과 팬과 도마가 여자들만의 영 역이었을 때가 나는 좋았다. 봄비가 내려 진달래라도 흠뻑 핀 날에는 아 낙들이 들에 나와 화전을 지져먹고 놀았다는데 얼마나 멋진 일이었을까 싶다. 황진이와 같은 옛날 멋쟁이들 을 다룬 소설을 보면 시종을 대동하 고 핑크빛 동산에 나가 화전놀이를 하는 장면이 곧잘 나온다. 준비한 찹 쌀가루를 더운 물에 반죽하여 동그 랗게 빚고, 풍로에 불을 지펴 번철을 올려 기름을 두른다. 번철이 달궈지 면 빚어둔 찹쌀 반죽을 한 알씩 올려 서 눌러 지지고, 한 쪽이 구워지면 뒤집어놓고 꽃잎을 똑똑 따서 올려 멋을 부린다. 이렇게 간단한 요리지 만, 꽃을 따다준 남정네들은 개울에 발을 씻고 게으름피우고, 기다렸던 진달래를 치마폭에 얻어내면 선물처 럼 화전을 지져주던 아낙들의 주고 받음이 얼마나 로맨틱 했던가 싶다. 황진이처럼 몸종을 부릴 수 있었다 면 사랑하는 사람과 풀밭에 나른하 게 앉아 화전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 서 더워지는 봄바람에 마음을 맡겨 도 보았을 터. 그래야 시간이 흐르고 겨울이 와도 꽃잎 떨어진 목련을 보 면서 추억할 봄날이 있지 않았겠나. 21세기에는 남녀가 생김도 비슷, 하 는 일도 비슷해진 요상한 시절이라 봄날의추억도점점힘이든다. 봄날은 좀 엉성하다. 순진해서 꽃 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자는 알뜰한 맹세도 믿고, 별이 뜨 면서로웃고별이지면서로울자던 실없는 기약에도 희망을 걸어본다. 얼마 전 남편과 사소한 일로 다투고 는 토라져 있던 내게 엄마의 문자 메 시지가 도착했다. ‘얘들아, 싸우지들 말아. 봄날은 짧은겨’남편과 나는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눈시울을 붉혔고, 이후 다툼 대신‘알뜰한 맹 세’가 늘어나게 되었다. ‘여자’로 사 느라 피곤한 나의 봄날은 대략 이렇 게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