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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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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타 - 박재은 2006년 05월 291호
꽃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
더라’라고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봄날은간다’라는제목의이노래는
울 엄마의 십팔번. 엄마의 노래 솜씨
는 백점짜리가 아니지만, 그 필(feel)
은 조용필이 부른 버전 못지않게 진
하다.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
면 따라 우는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
은 간다고 하는 노랫말이 문득 떠오
른 것은 며칠 전, 길에서였다. 봄볕
이나 쪼이려고 올라탄 시내버스가
신호에 묶여 압구정 어디에 서 있는
데, 창 밖으로 할머님 한 분이 지나
고 계셨다. 자줏빛 양말에 베이지색
단화, 꽃무늬가 은은한 감색 스커트
에 팥죽색 카디건을 걸치신 할머님
의 모습은 압구정동을 지나는 누구
보다 화사했고, 나처럼 봄볕에 겨워
나오신 듯 보였다. 나도 모르게 할머
님 발걸음을 눈으로 쫓고 있었는데,
할머님은 정거장에 핀 목련나무 아
래서 딱 멈춰 서셨다. 나는‘버스를
타시려나?’생각했는데, 할머님은 그
자리에 서서 목련꽃을 올려보실 뿐
이었다. 절정을 지나 꽃잎이 뚝뚝 지
기 시작하는 목련나무를 할머님은
한참 올려보고 계셨다. 버스는 출발
했고, 그 순간‘보옴 나알은 가아안
다~’하는소절이떠올랐다.
여자
예쁜 남자, 강한 여자가 인기를 모
으는 이 시대에도 구닥다리 내 취향
은‘여성스러운 것’에 머무른다. ‘여
성스럽다’라는 정의조차 그 경계가
모호한 세상에서 풍금처럼, 조선여
자처럼, 황진이처럼 살아가기란 쉽
지가 않다. 나는 서른이 넘은 유부녀
인데 아직도 까만 생머리를 길게 하
고 다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리
를 단단하게 조여서 하나로 묶었다
가 잠들기 전에 고무줄을 풀고 빗으
로 쓰다듬어 내리는 순간이 너무 행
복한 것도 한 이유다. (물론 빗은 해
남에서 장날에 산 참나무 얼레빗이
다.) 기자와 요리사로 만난 남편이
내게 반한 것은 밥을 볶는 나의 뒷모
습을 본 순간이라고 하는데, 나는 앞
꽃전
치마를 꽁꽁 처매고 쪼그려 앉아 요
리하는 것이 편타. 작은 손가방에는
거울이랑(트윈 케이크 파운데이션에
붙어 있는 거울이 아닌) 손수건을 갖
추어야 멋쟁이이고, 바지보다는 치
마를 입어서 걸음걸이가 좁아져야
여자답다고 생각한다. 나의‘여성스
러움 강박증’은 그 도가 지나쳐서 음
식촬영을 위해 예닐곱 시간을 서 있
어야 할 때에도 하이힐을 고집하고,
아무리 밥하기 싫은 날도 남편을 부
엌에 들이기 꺼려하는 부작용으로
돌아온다. 여성스러우면 이제 생활
이 불편해지는 시대가 온 것일까?
나같이 여성스러움에 집착하는 이들
은 비실용적인‘공주과科’로 뭉뚱그
려지거나 무성無性의시대에발맞추
지 못하는 낙오자로 치부된다. 그럼
에도불구하고내가고루한‘여성성’
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뭘까? 바로
봄날이 가는지 오는지 느끼고 싶어
서다. 여자로서의 내가 피려고 할
때, 피고 있을 때, 꽃잎이 한 장 떨어
지기 시작할 때를 놓치기 싫어서라
면 누가 믿어줄까? 눈이 휙 돌아가
게 바쁜 한 세상, ‘인간’박재은이 아
닌‘여자’박재은으로 살면서 나의
사계四季를맛보고싶어서다.
화전
불과 팬과 도마가 여자들만의 영
역이었을 때가 나는 좋았다. 봄비가
내려 진달래라도 흠뻑 핀 날에는 아
낙들이 들에 나와 화전을 지져먹고
놀았다는데 얼마나 멋진 일이었을까
싶다. 황진이와 같은 옛날 멋쟁이들
을 다룬 소설을 보면 시종을 대동하
고 핑크빛 동산에 나가 화전놀이를
하는 장면이 곧잘 나온다. 준비한 찹
쌀가루를 더운 물에 반죽하여 동그
랗게 빚고, 풍로에 불을 지펴 번철을
올려 기름을 두른다. 번철이 달궈지
면 빚어둔 찹쌀 반죽을 한 알씩 올려
서 눌러 지지고, 한 쪽이 구워지면
뒤집어놓고 꽃잎을 똑똑 따서 올려
멋을 부린다. 이렇게 간단한 요리지
만, 꽃을 따다준 남정네들은 개울에
발을 씻고 게으름피우고, 기다렸던
진달래를 치마폭에 얻어내면 선물처
럼 화전을 지져주던 아낙들의 주고
받음이 얼마나 로맨틱 했던가 싶다.
황진이처럼 몸종을 부릴 수 있었다
면 사랑하는 사람과 풀밭에 나른하
게 앉아 화전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
서 더워지는 봄바람에 마음을 맡겨
도 보았을 터. 그래야 시간이 흐르고
겨울이 와도 꽃잎 떨어진 목련을 보
면서 추억할 봄날이 있지 않았겠나.
21세기에는 남녀가 생김도 비슷, 하
는 일도 비슷해진 요상한 시절이라
봄날의추억도점점힘이든다.
봄날은 좀 엉성하다. 순진해서 꽃
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자는 알뜰한 맹세도 믿고, 별이 뜨
면서로웃고별이지면서로울자던
실없는 기약에도 희망을 걸어본다.
얼마 전 남편과 사소한 일로 다투고
는 토라져 있던 내게 엄마의 문자 메
시지가 도착했다. ‘얘들아, 싸우지들
말아. 봄날은 짧은겨’남편과 나는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눈시울을
붉혔고, 이후 다툼 대신‘알뜰한 맹
세’가 늘어나게 되었다. ‘여자’로 사
느라 피곤한 나의 봄날은 대략 이렇
게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