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그때, 눈이 큰 스무 살 우리 큰누님은 날 보내면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어머내가 가끔 들여다보는 사진 두 장이 있다. 두 장 다 두 누님이랑 나랑 셋이 찍은 사진이다.
한 장은 고향(경북 성주군 초전면 대장리)집 앞뜰에서 찍었다. 물론 빛 바랜 흑백사진이다.
내 나이 겨우 다섯 살, 큰누님 갓 스무 살 새댁, 작은누님 꽃다운 열일곱 살 처녀. 오 리 밖 등
너머로 시집갔던 큰누님의 첫 친정나들이 때 그 기념으로 찍었다고 한다. 물경 57년 전, 1949
년께 사진이다. 큰누님은 바글바글 볶은 파마머리에 치렁치렁한 한복을 입고 나무 의자에 위
풍당당(?) 앉아 있다. 어린 나는 큰누님의 무릎 위 치맛자락을 거머쥔 채 바짝 붙어 서 있다.
무명 바지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차렷하고 있다. 작은누님은 댕기머리에 몽당치마저
고리를입고, 고개를빼딱갸웃하게해서뒤쪽에서있다. 시골처녀지만작고하얀얼굴이참
예쁘다.
그리고또한장의사진. 훌쩍세월이흐른지난2000년6월, 내가받은‘김달진문학상’시상
식장 무대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역시 이 누님들 사이에 내가 서 있다. 셋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촌색시, 시골처녀, 무명 바지저고리의 코흘리개 티는 간 곳 없고, 세 사람 모두 꽤 잘 차
려입었다. 그런데아, 함께어슷비슷늙었다.
큰누님은 체구가 컸다. 호탕한 성격이 남자 같았다. 우리 5남매 중 맏이였고 시집가서도 7
형제, 8남매가 북적대는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시집살이를 마치고 자형의 직장(대한통운)
을 따라 대구로 충주로 서울로 이사를 다녔으나 통이 크고 인심이 후해 친정이나 시집 쪽에
서두루인기(?)가좋았다. 나는주로이큰누님등에업혀컸다고한다.
작은누님은 여러 모로 큰누님과는 많이 달랐다. 지금(73세)까지도 날씬한, 새침데기 같은
미인이다. 성품은 옹골차고 대쪽 같다.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옹이’가 있고, 어떤 급박한 상
황 앞에서도 눈 차악 내리깐 채 차분하다. 매사 사리분별이 명확하고 자기 입장이 분명해서
냉정하다 싶을 정도다. ‘출가외인’의 자세를 견지하고 지극히 알뜰하다. 그래서 때로 친정식
구들의 섭섭함을 사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죽어라고 독학을 해서 자신의 실질적 학력을
많이 끌어올린 사람이다. 그러나 사실은 속정이 깊고 진정하다. 나는 어릴 적 이 작은누님으
로부터 이런저런 보살핌과 함께 글쓰기의 영향도 다소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상당한
부농이었던 우리 아버지(작고)의 일생일대 실수는 이 두 누님을 공부 시키지 않았다는 점이
다.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더 이상 진학의 길을 막아버린 것. 누님들은 평생 그것이 한이었
다. 아무튼 두 누님은 말년을 서울에서 함께 살았다. 자주 내왕하면서도 정면으로 대조를 이
루는 성격 탓에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씹기도 하면서, 그러나 더 많이는 친구처럼 잘 지냈다.
거침이 없고 정을 잘 내는 큰누님은 아버지가 좋아했고, 알뜰하고 깔끔한 작은누님은 어머니
가좋아했다고한다.
올 초, 지난 1월 12일. 이 두 사진 속의 세 사람 중 큰누님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큰
누님의 평소 소원대로 아무런 고통 없이, 자는 듯이 그렇게 갑자기 떠났다. 향년 76세. 10여
년전나는큰누님, 작은누님을추억하는시한편씩을쓴적이있다. 먼저큰누님과의애틋한
사연을적은시를여기옮겨본다.
곤충채집할때였다. / 물잠자리, 길앞잡이가길을내는것이었다. / 그길에취해가면오리
길 안 쪽에 / 내 하나 고개 하나 있다. / 고개 아래 뻐꾹뻐꾹 마을이 나온다. / 그렇게 어느 날
장갓마을까지 간 적 있다. / 장갓마을엔 큰누님이, / 날 업어 키운 큰누님 시집살이 하고 있었
는데 / 삶은 강냉이랑 실컷 얻어먹고 / 집에 와서 으스대며 마구 자랑했다. / 그런데 그걸 어
떻게 알았을까, / 느그 누부야 눈에 눈물 빼러갔더냐며 / 어머니한테 몽당빗자루로 맞았다. /
다시는그런길, / 그리움이내는길가보지못했다.
- 졸시, <눈물> 전문
정말로 그때, 눈이 큰 스무 살 우리 큰누님은 날 보내면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래, 우리는 모두 지금은 알고도 남는다. 사람의 사랑이 미루어 짐작하
는 사실, 아니 확실히 짚어내는 진실은 구구한 설명 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주적
으로 통하는 여백, 혹은 행간의 의미에 의해서다. 그것이 더 깊이 뼈저리게 하고 복받치게한다.
큰누님의 삼일장을 치르고 작은누님과 작은형님(66세), 그리고 나(62세)는 어머니를 뵈러갔다. 어머니는 올해 연세 아흔여섯. 아직 자세도 꼿꼿하고 정신도 맑다.
아주 건강하시다. 몇 년 후 백수잔치를 하기 위해 벼르고 있었는데, 큰누님을 앞세우고 말았으니 헛꿈이 돼버렸다. 어쨌든 우리는 어머니께 큰누님 이야기를 숨기기로 했다. 승용차 안에서 작은누님이 한숨을 섞어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이 동생들, 잘 들어. 우리들의 맏이, 언니가 갔어. 이렇게 차례차례 가는 거다. 느그들 누구도 이제 내 앞에 죽지 말어! 알았지?”십수 년전 작은누님은 이미 남편인 작은자형을 잃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쯤에서또같은기간에작은누님을그리며쓴시한편을소개하고싶다.
작은누님도 시집갔다. / 곱게 물든 손톱 갖고 시집갔다. / 방올음산 산발치 선거릿재 너머
등골 / 화물차 타고 시집갔다. / 어머니, 둑에 나가 방올음산 바라보았다. / 울밑에 앉아 봉선
화 보았다. 또 / 울밑에 앉아 봉선화 보았다. / 그해 여름 봉선화 유난히 붉어 / 그해 여름 봉
선화다지고말아/ 물에손시린가을이왔다.
- 졸시, <봉선화> 전문
아끼던 둘째 딸까지 시집보내놓고 어머니는 그날 마음이 어땠을까. 어머니는 요즘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 있는 작은형님네 아파트에 와 산다. 하루 한 번 바깥운동도 한다. 작은누님과
대구에 사는 나까지 들이닥치자 어머니는 화들짝 반기며“각중에(갑자기) 이기 웬 일이고”
하면서 대뜸, “느그 큰누부야는 안 오나?”하며 하필 내게 물었다. 나는(우리는) 약속대로 딴
청을 부리며 어물쩍 넘어갔다. 어물쩍 넘어가는데도 어머니는 이제 날 때리지 않는다. 아파
트엔 하긴 몽당빗자루도 없지 않은가. 그런 다음… 그 다음에도 어머니한테 들렀으나 어머
니, 큰누님에 대한 안부를 두 번 다시 묻지 않았다. 다만“내가 와 이리 오래 사노!”할 뿐이
다. 그 탄식을 처음 듣는 건 아니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자꾸 전에 없이 들린다. 꼭 큰누님의
일을 알고 자책이라도 하는 듯, 그리하여 당신 자신을 때리고 있는 듯 들리기도 한다. 작은누
님은요즘많이허전해한다. 여기저기여행다니고있다. 밉다곱다해도남동생들이모르는,
같은 여성인 자매끼리만 의지하고 소통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지 않겠는가. 나는 지상의 작
은누님과지하의큰누님에게가슴속깊이한마디중얼거리고싶다.
“봐요, 누님들! 우리셋이‘언제, 어디서다시만나’사진한판더찍읍시다.”
그것이그래, 언제이며또거기가어디일까. 인연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