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태생인 나는 해방이 되면서 오대산으로 입산 출가했다.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그때, 오대산 적멸보궁에 다니셨던 외할머니에게 ‘그곳에 가면 도인이 계셔서 난리를 막아준다’라는 말씀과 ‘여성수도원이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 소리를 귀담아 들으면서 적멸보궁에도 가보고 싶었고 여성들이 모여서 수도한다는 곳에도 가보고 싶어 월정사를 찾아간 것이었다. 월정사에 도착해 ‘여성들이 수도하는 데가 있다는데요?’ 했더니 비구니 참선도량이었던 지장암으로 안내해주었다.
오후 네시쯤이었다. 방선시간이었는지 남자 옷에 조끼를 입고 머릴 깎은 남자분이 뜰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여성 수도원을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요?’ 하고 안내해준 이에게 그랬더니, ‘저분은 여자랍니다”라고 해서 비구니스님인 줄 알았다. 그러나 불법이 어두운 강릉에서 자란 나는 그 스님을 이렇게 부르면서 물었다.
“할머니!”
“왜 그래요?”
“저도 여기 와서 살고 싶은데 그럴 수 있습니까?”
“살면 되지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아직 나이도 어린데 일생을 여기서 살다 죽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여쭈었다.
“여기서 살다가 나갈 수도 있습니까?”
“인연이 다하면 그렇게 하는 거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툇마루로 옮겨 앉아 다시 내가 얌전해 보이는 스님에게 물었다.
“그러면 스님들은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공부를 하지요. 우리들 공부는 세속의 공부가 아니라 모든 역경을 초월하는 공부랍니다.”
성질이 급한 나는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한달 후 지장암으로 들어갔다. 출가를 반대하지 않았던 부모님들은 내가 나중에 삭발한 모습으로 집에 들렀더니, 아버지는 ‘뭐, 그래 가지고 왔나?’ 하시면서 담뱃대를 들고 휘익 나가버리셨고 언니와 동생들은 자꾸 울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월정사 주지 소임을 이종익 스님이 맡고 있었는데, 내가 강릉에서 왔다고 하니까 ‘강릉에서는 신사임당 이후로 여자 위인이 나오지 않았으니 잘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가끔 지장암에 들르시는 그분께 인사를 드리고 앉아 있으면, ‘앉은 모습이 편안하게 보이는 앉은 상’이라고 하셨는데, 그분께 요령 치는 것 등 예식을 배웠고, 큰절에 내려가 그분에게 《금강경》을 배우면서 마음속에 들어왔던 감동이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장암에 들어가 아직 삭발하지 않은 채 있을 때, 비구스님 한 분이 물었다.
“호화 찬란한 세상 살기를 좋아해서 모두들 시집 장가가고 사는데 이렇게 첩첩산중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스무 살 무렵이던 나는 그때 이렇게 당돌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여자나 남자나 다 똑같은데, 어디가 표시가 좀 다르다고 해서 남자의 부속이 되어야 하는 게 싫었습니다.”
아마도 나의 출가는 발심출가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해 평범하지 않았던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
당시 지장암엔 인홍 스님이 도감으로 계시면서 일생을 오후불식 하시면서 복을 아끼셨던 한암 스님의 법을 실천하면서 엄격하게 행자를 비롯해 스무 명 남짓의 대중들을 외호하고 있었다. 예불에 조금 늦게 들어와도 대중공사를 할 만큼 엄격했는데, 공양할 동안 정면에 부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공양이 끝나면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상판과 하판에 앉아 계신 여러 스님들, 그리고 탁자 밑에 앉아 있는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에게도 절을 해야 했다. 입선을 들이고 있는 큰방을 지날 땐 신을 벗고 맨발로 소리나지 않게 지날 만큼 빈틈없이 여법하게 생활을 했던 것이다.
참선도량이었던 지장암에서의 행자생활은 참으로 바빴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 입선을 들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해 하루 종일 일하는 틈틈이 염불 익히랴 참선하러 큰방에 들어가랴 눈코 뜰 새 없었다. 겨울이면 남폿불에 둘러앉아 멀건 시래기죽에 배급받은 콩깻묵을 타서 먹었고, 여름이면 밭일을 하느라 일이 고되어서 저녁에 9시만 되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때때로 대중들이 잠들면 빠져나와 캄캄한 마루에 앉아 염불을 외우고 또 참선을 해보곤 했다. 도의 길로 나아가는 배움의 길을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행자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노스님들, 어른스님들 모두가 한 방에 앉아 참선을 익혔던 당시의 분위기는 아마도 한암 선사님의 덕화로 인한 위력이었을 것이다.
오대산에 살았던 초발심 시절, 한암 선사님에 대한 기억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분처럼 대중을 외호하는 데 철저하셨고 복을 아낀 분은 없을 것이다. 군인들이 와서 도시락을 먹고 수각에 밥을 흘려놓으면 스님께서 직접 나가셔서 밥풀을 다 바가지에 주워서 씻어 가지고는 그 사람들 보는데 잡수시곤 했다. 그러면 다음엔 그들이 와서 그런 짓을 하지 못했으니, 스님께선 그렇게 쌀 한 알의 소중함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농부의 피땀하고 조합하면 쌀 한 알에 일곱 근이다’ 란 말씀을 하셨는데, 밥알 하나 썩는 것이 농부의 피땀 일곱 근이 썩어버리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내 출가수행의 길에 물자절약과 인과에 대한 지침이 되었다. 그 모습을 뵌 이후 우린 밥풀 반 알도 버리지 않는 생활을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과설을 보면 기가 막힌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전에 참선을 하면서도 휴식 시간에 인과설을 서로 이야기했다. 다른 잡담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한암 선사님의 무언의 가르침은 우리의 뼛속까지 각인된 것이었다.
지장암 도감이셨던 인홍 스님의 한암 선사님에 대한 지극한 모심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부처님처럼 받들어 모셨던 그 모습과 한암 선사님의 대중에 대한 사랑은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상원사에 계신 선사님을 찾아뵈려 길을 떠나면서 인홍 스님은 산딸기를 따서 싸라고 했다. 지금은 너무 흔한 쌀밥조차 구경하기 어려웠거니와 어렵게 들어온 쌀 서너 되로 떡을 해서 한암 선사님이 계신 상원사로 조금, 월정사 큰절로 조금씩 돌리고 나면 고물밖에 남지 않았던 시절, 산딸기를 따서 물기를 빼고는 그릇에 담아서 수건으로 꼭 묶고는 삼십릿길을 나섰다. 상원사에 도착해 선사님께 절을 올리고 산딸기를 내밀었더니, 꼭 두 알을 집어 드시고는 뚜껑을 덮으시고 나서 시자를 불러서 ‘이 나머지는 오늘 대중공양 시켜라’ 하고 이르셨다. 나는 지금도 대중 외호를 정성으로 하셨던 선사님의 자비한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스님을 부를 줄 몰라 ‘할머니’라고 불렀던 행자시절을 지나 어느덧 육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기라성 같은 선지식을 찾아 제방 선방으로, 무너져내린 절을 다시 세우는 일로 한평생을 보내고 한적하게 지내고 있는 내게 얼마 전, 신도 한 분이 전화로 ‘묵 스님, 건강하십니까?’ 하고 안부를 물어왔다. 내가 대답했다.
“네, 건강합니다. 보살님이 묻고 대답하는 그 자리만 건강하면 되지요.”
불법은 그분이 내게 묻고 내가 대답하는 바로 그 자리가 아닌가. 그 도리만 알면 삼라만상 그대로고 우주만물 그대로다. 한바탕 꿈꾸다 가는 세상, 아옹다옹 불평불만 늘어놓고 살 것 있는가. 내게 허물이 없으면 남의 허물도 보이지 않는 법, 항상 부드럽고 선하고 어질게 살면 된다. 인과를 믿으면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고 모두가 편안하다. 그것이 또한 블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