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늘 뭔가 빠진 듯한 기분이었지. 사업을 할 때마다 그랬어. 이젠 알 수 있어. 실패한 건 내가 아니라 그 때문이었지. 그걸 알았다 해도 전엔 어쩔 도리가 없었겠지. 이런 건 만들 수가 없거든. 바로 그것이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었어.”『쉰들러는 자신의 사업에 전쟁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폴란드에서 법랑용기 제조공장을 운영하는 독일인 쉰들러는 독일군 장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수용소 거주 유태인의 노동력을 헐값에 사용하게 되었다. 투자자들도 유태인이었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오직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즉결처형을 가차없이 시행하는 수용소장과 독일군들의 학살만행을 지켜보면서 점차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유태인들을 향한 동정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마침내 아우슈비츠행이 결정된 공장노동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빼돌리기 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여 그들을 사들인다. 죽음의 돌풍을 막아줄 명단,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에는 천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아우슈비츠행을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쉰들러는 말하자면 현대판 보살菩薩이라 할 수 있다. 보살은 보디사트바를 말한다. 보디는 깨달음, 사트바는 중생을 뜻한다. 한편으로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생명들을 평화의 세계로 인도하는 중간자적 존재이다.
보살의 출발점은 발원發願이다. 서원誓願을 발發한다는 것,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욕심과는 다르다. 쉰들러도 처음에는 단지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마음을 돌이켜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유태인들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발원을 가지게 되었다.
욕심은 일종의 습관적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자 하는 습관적 에너지. 이러한 욕심은 쉽게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자체가 욕심으로 인한 것이고, 과거 생에서 금생에 이르도록 수없는 세월 동안 습관적으로 축적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심을 없애고자 부질없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마음을 돌이켜 큰 욕심을 세우도록 유도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입장이다. 즉 개인적 탐욕심이라는 에너지의 방향을 돌이켜 커다란 욕심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진리를 깨치고자 하는 욕심, 기도 성취를 얻고자 하는 욕심,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자 하는 욕심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미 욕심이 아니라 발원이라 말할 수 있다.
욕심과 발원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욕심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다. 하지만 발원은 공통적 바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 나 하나만을 위한 욕심이 아니라, 우리 모두 즉 인류 전체와 모든 생명을 위한 염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나와 남은 구분되지 않는다.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이 나의 행복이며, 남의 불행이 나의 고통이 된다.
둘째,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며, 발원은 능동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잘 먹고 잘 살며,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하지만 발원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일부러 원을 발하여 자꾸 베푸는 마음을 연습함으로써 나와 남을 가르는 이분법적 견해가 녹아내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발원은 과정 자체를 즐긴다. 대부분의 욕심은 미래의 목적달성에 중점이 두어져 있기 때문에 현재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발원은 미래나 과거에 애착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서 다만 열심히 노력할 뿐인 것이다.
결국 발원은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것’이다.□
달마, 이 영화를 말한다.
“고요한 밤 산당에 말없이 앉았으니
적적하고 쓸쓸함이 본래 그대로인데,
무슨 일로 서풍은 임야를 움직여서
끼루룩 찬 기러기 소리 먼 하늘에
울려 퍼지게 하는가.”
山堂靜夜坐無言 寂寂寥寥本自然
何事西風動林野 一聲寒長天
-《금강경오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