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따라 집 가까이 있던 나주 다보사엘 자주 다녔다. 햇과일이 나면 으레 어머니는 정성스레 과일을 담아 다보사에 올리곤 했다. 그곳엔 전강 스님, 고암 스님, 우화 스님 등 몇 스님들이 주석하고 계셨는데, 가보면 언제나 선방에 앉아 참선을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였다. 방학 때 올라가면 스님들 틈에 끼어 발우를 펴고 앉아 있기도 했고, 저쪽 탁자 밑에 앉아서 가부좌를 틀곤 했다. 그리 앉아 있으면 마치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 느낌이 나를 출가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양하고 소제하는 것말고는 정진만 하시던 고암 스님께, 하루는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했더니, 두말 않고 큰스님 밑에 가서 중이 되어라 하시면서 당신의 사형이신 범어사 동산 스님께 소개장을 써주었다. 속가집 옆에 다보사에 딸린 논답이 있어서, 나중에 종정이 되신 고암 스님께선 논에 들르셨다가 우리 집에 들러 과수원 나무 밑에 앉아 공양도 드시고 과일도 드시곤 하셨던 분이다. 그래서 나중에 계를 받고 범어사에 있을 때 오셔서는 누구야! 하시며 내 속가 이름을 부르곤 하셨다. 그리고 내가 집에 출가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나오자, 어머니께서는 무척 나를 찾아 다녔다고 하는데, 다보사에 들러 나의 행방을 알려고 하였으나 고암 스님을 비롯해 모든 스님들이 함구하셨다고 한다.
지금처럼 단풍이 아름답던 가을이었다. 옷가지를 넣은 보퉁이를 하나 들고 집을 나와 범어사에 도착하니 오후 세시쯤이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앞으로 올라가니 아주 잘 생긴 노스님 한 분이 노란 옷을 입고 법당으로 들어가시는 중이었다. 그래서 얼른 앞으로 가 꾸벅 절을 하고는 동산 스님을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싱긋이 웃으시면서 저 밑에 있는 문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가 보아라 하셨다. 이튿날, 원주스님의 안내로 동산 스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선 같은 한 노스님이 들어오셔서 올려다보니 바로 전날 대웅전 앞에서 뵈었던 노장님이었다. 나의 은사가 되신 동산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소개장을 내놓으니 싱긋이 웃으시곤, 멀리서 왔구나. 중노릇 잘해라 하셨다.
중노릇 잘해라, 나의 은사스님께서 내린 그 가르침은 한평생 내 가슴에 화두처럼 살아 있었다. 나는 그날 그 말씀을 들은 이후로 다른 생각 내지 않고 절집에서 여법하게 살면서 중노릇 잘해야겠다란 생각만 했다. 나이 칠십이 다 된 지금 돌아봐도 별 후회없이 열심히 살았다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은사스님의 그 한 말씀을 품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1959년, 그렇게 시작된 나와 은사스님과의 인연은 출가하자마자 스님 밑에서 세숫물 떠나르고 밥상도 가져다 드리면서 행자시절 동안 모시다가, 강원에도 다니고 선방에도 살다가 강진 만덕사에서 살 때, 한 철 다시 시봉하게 된 것으로 이어졌다. 우리 스님께서 종정을 그만두시고 그리로 잠깐 쉬러 오셨을 때였다.
내가 행자시절을 보내던 당시 종정으로 계셨던 우리스님은 새벽 두 시면 정확히 일어나 앉으셔서 《신심명》을 독송하시곤 했다.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신심명》 독송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셨는데, 나는 그 내용이 몹시 궁금해서 나중에 강원에 있으면서 우리 스님이 날마다 하시는데 내가 몰라서 되나 하는 생각에 강사스님께 특별히 부탁해 뜻을 새겨 달라고 해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신심이 나고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느꼈던 《신심명》은, 그래서 지금도 보고 있노라면 느낌이 다르다.
아침 저녁으로 법당에 올라가셔서 예불드리고 마당을 쓰시는 것 또한 평생 그치신 일이 없던, 그리고 시간을 금쪽같이 아껴쓰고 빈틈없이 생활하시는 우리 스님의 생활은 내가 평생 중노릇하는 데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성질이 급하신 편이어서 시봉을 잘못하면 때론 주먹이 한 방 날아오곤 했다. 한번은 잠이 좀 덜 깬 상태에서 그랬는지, 아침 세숫물을 데워 가지고는 찬물을 섞어서 적당히 온도를 맞췄어야 하는데 그냥 드리고 말았다. 스님께서 세숫대에 손을 넣었다가 바로 꺼내시는가 싶었는데, 주먹이 곁에서 수건을 들고 서 있던 내 얼굴로 날아오고 말았다. 피해볼 도리도 없이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다. 행자시절 그렇게 딱 한번 혼났고, 또 한번은 칭찬을 들은 일이 있다.
스님께선 세수를 하시면 꼭 고무나무 한 그루에 세숫물을 부으셨다. 원예 전공인 나는 비눗물을 나무에 주면 나무가 죽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감히 행자인 처지에 그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당시 귀한 나무 가운데 하나였던 고무나무를 죽이고 말았다. 나는 그 나무를 뽑아서 위를 잘라내고 뿌리를 흐르는 개울물에 씻고는 모래를 가져다가 나무를 심어놓았다. 이파리가 다시 어느 정도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다시 그 자리에 가져다가 놓았더니, 노장께서 이 나무 어디서 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그러셨다.
참, 장하다. 네가 나보다 잘하는 것이 있구나.
우리 스님 곁에서 지낸 행자시절은 참 열심히 살았던 시간들이었다. 얼마 전 행자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을 우연히 만나 행자시절을 끝내고 우리 스님을 모시고 찍은 사진 한 장을 건네받고 확대해서 곁에 두고 보고 있다. 사진 속 행자 도반들을 헤아려보니 딱 스무 명이다. 반드시 도통하리란 기백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속가에서 불심 깊은 좋은 부모님을 만났고 출가해선 정신적 지도자인 스승을 만났다. 생활의 지도는 누구나 할 수 있어도 정신적인 지도는 스승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출가의 길은 순명順命의 길이다. 불법을 순명하고 스승을 순명하는 것이다. 무조건 받고 명을 따라야 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순명 안에 진리도 있고 질서도 있고 수행도 있는 것이다.
나의 은사이신 동산 스님께서 생전에 상좌를 백수십여 명이나 두셨다. 늦게 불문에 들어오는 상좌는 보통은 손자상좌가 되는데, 스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무슨 소리야? 한 다리가 천 리라고 아들하고 손자가 같은가? 내 앞으로 해 하셨는데, 그러한 스승의 영향 때문일까, 나도 상좌가 다른 사람보다 많은 편이고, 또 그러한 스승의 자애로움 때문에 훌륭한 스님들을 사숙으로, 사형으로 모실 수 있었다. 출가해 불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결코 누릴 수 없었을 한없는 복이 아닌가 싶다.
출가해서 잊을 수 없는 또 한 분은 나의 사형인 광덕 스님이다. 출가의 길에서 은사이신 동산 스님께서 정신적 지주였다면, 광덕 스님에게는 중노릇하는 데 마음 씀씀이를 배웠다. 자기를 버리고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살았던 보살, 광덕 스님은 우리 스님이 돌아가시자 의지할 데가 없는 나에게 더 없는 의지처였다. 칠팔 년을 모시면서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나의 사형은 내게 서해瑞海라는 법호를 지어주시며 격려해주더니 몇 년 전 홀연히 세연을 거두었다.
출가한 지 어느덧 반 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중노릇 잘 하리란 초발심 정신 그대로 흩어지지 않고 여법하게 잘 살아왔다고 자인한다. 범어사에서 출가해 거의 한평생을 범어사에서 살았다. 도심으로 올라와 서울 한복판에 있는지 네 해, 이젠 다시 범어사로 돌아갈 시간이다. 작년에 울컥, 내가 이렇게 늙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올라온 이후 출가절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마도 내년쯤 나는 범어사 작은 암자의 뒷방에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법당에 올라가 부처님께 참회하고 마당 쓸고, 채마밭을 갈고 있을 것이다.
평범한 촌로로 돌아가 한가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