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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수행을 통해 새로운 활로가 개척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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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박종린 2005년 11월 285호
언제부터인가 우리 절 집안에 고행을 멀리하는 이상한 풍토가 생겼다.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고행을 멀리하고 있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수행은 그 자체가 고행인데, 고행이 없다면 수행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수행자가 가는 길이 바로 고행길이 아닌가? 수행에서 고행이 없다면 그것은 놀이이고, 유희일 뿐이다. 그럼에도 고행을 멀리하고 있으니 참 요상한 일이다. 수행에서 고행이 배제되면 그것은 더 이상 수행이 아니고, 고행이 없는 수행자는 참다운 수행자일 수가 없다. 고행이 없이는 수행이 되지 않으며, 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수행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행을 한다면서 고행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부처님도 고행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고행을 버린 것은 고행해서 깨친다는 그릇된 믿음을 버린 것이지 수행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고행을 버린 것이 아니다. 어느 수행법을 택하던 수행은 고행이지 고행 아닌 것이 없다. 다만 수행은 내가 좋아서 기꺼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기에 고생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니 수행은 고행이 아닌 것처럼 보일 뿐 고행이 아닌 것은 아니다. 마지못해, 아니할 수 없어 하는 고생은 생고생生苦生이 되지만, 자청해 하는 고생은 고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이치와 같다.
요즘 세상살이가 너무나 편해지다보니 조금만 고생스러워도 사람들은 못 참아 한다. 편리해지고 쉬워지고 마음먹은 대로 금방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보니 참고 기다리는 것의 의미는 거의 퇴색되어버렸다. 인내니 인욕이니 하는 말조차도 흔치 않은 말이 되어버렸다. 세속인들이야 그럴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출가 수행자들마저 속인들의 그릇된 행태를 닮아가는 듯해 안타깝다. 출가는 일상의 안주에서 벗어나려는 고행길이고,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고행자가 된다는 의미와 상통하기에 출가와 출가자의 삶에 고행이 빠져버린다면 그곳에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수행도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몸으로 고생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러다보니 몸이 수고로운 절 수행 같은 것은 아예 하려들지도 않는다. 아무리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 하지만 몸을 떠난 마음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인데 몸을 잘 다스리지 않고 어떻게 마음이 건강할 수 있단 말인가. 수행을 함에 있어 몸을 배제하고 이루어질 수 있는 수행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쉬운 수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힘들여 하지 않고 되는 수행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 힘들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몸이 수고로운 것이다. 몸이 수고롭지 않은 수행은 수행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이 마음의 존재라면 중생은 몸의 존재다. 몸뚱이의 존재인 중생이 부처 되고자 하면서 몸의 수고로움을 멀리한다면 수행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몸으로 하는 가장 충실한 수행이 절 수행이다. 중생 기운을 벗어버리는 데 절 수행만큼 수승한 수행도 드물 것이다. 몸을 조복받지 않고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성불이라는 깨달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몸으로 수행하는 노력은 필연적이다. 마음이 깃드는 곳간인 몸이 부실하면 마음은 다 새버리고 만다. 깨진 그릇에서 물이 새듯이 말이다. 몸을 통한 마음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은 다스려지지도 닦여지지도 않는다. 절 수행은 마음의 곳간인 몸을 튼튼히 하는 일이고, 그곳에 담긴 마음이라는 물건을 싱싱하게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그럼에도 절하는 것을 수행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절은 󰡐깨달음과 무관한 하지 않아도 되는 고행󰡑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절이야말로 하심下心과 겸양의 미덕을 기르는 으뜸가는 수행이고, 수행자로서 원력과 신심을 키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수행이다. 한마디로 말해 절은 수행자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필수적인 덕목이자 죽는 날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행 중의 수행이다.
절 수행이 이렇게 중요한 수행임에도 일상의 수행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불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자 비극이다. 행자 시절 3천배 하는 것이 절수행의 전부이다 시피 하고, 아니면 무슨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벌로 3천배를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참선하다 참선이 안 될 때 잠깐 기도하는 방식의 하나로 절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불자로서의 자기정체성 확립은 물론, 수행자로서 수행에 대한 확고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하는 절 수행을 왜 이렇게 외면하는지 알 수가 없다. 깊은 신심으로 발심이 되지 않으면 무슨 수행을 해도 헛공부하기 십상이지만, 특히 참선수행자가 발심이 되지 않은 채 선방에 앉아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낭비와 손실은 없다. 발심이 되려면 몸에 붙은 중생 기운이 빠지지 않고는 어렵다. 중생 기운 빼는 데 절 수행만한 것이 없음에도 절 수행을 통한 하심과 발심도 되지 않은 채 선방부터 들어가서 단박에 깨치겠다고 달려드는 조급함이 개인적으로나 종단적으로 얼마나 큰 손해이고 무리한 일인지 알고나 있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한국불교의 주된 수행법인 간화선 수행이 제대로 잘 이어지게 하려면 먼저 절 수행을 시키고 선방에 들어가게 하거나, 절 수행과 간화선 수행을 병행토록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절 수행은 불자로서의 기본을 충실히 하는 일이기에 어디서 어떤 수행을 하든지 수행자라면 죽는 날까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수행이다. 어떤 수행법과 함께 병행해도 조금도 모순되거나 혼란이 없는 수행이 절 수행이다. 지금같이 산 속 선방에서 스님들끼리만 수선안거 결제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도심 사찰에서 재가인들과 함께 절 수행 안거 결제를 한다면 승과 속,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님을 실천하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절 수행은 침체된 한국불교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 희망의 수행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