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반, 스물여덟의 늦깎이로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합동으로 받는 행자교육이나 수계식이 없었다. 골방에서 삭발을 하고 행자기간도 일정하지 않았으니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사미계를 받던 시절이었다.
앞의 게송은 사미계를 받고 나서 큰스님들께서 출가의 길을 칭송하며 일러준 게송이다. 출가를 한다는 것은 그렇듯 ‘무상無常’을 깨닫고 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무상을 깨달았다기보다는 염세적인 생각에 젖어 출가를 했다.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다시는 세속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했을 만큼 세상이 싫었던 나는 출가를 앞두고 생각했다.‘깊은 산중에서 존경하는 스승 한 분을 모시고 죽을 때까지 조용하게 살아야겠다’ 라고. 그런데, 출가해서 불가에 들어와 수행을 해보니 불교는 세상을 등지고 혼자 가는 게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 선방에서 한 철을 똑바로 나고 나서 ‘아, 내가 불교를 잘못 알았구나’ 하고 깨달았으니 진속은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출가를 했을 땐, 6·25로 인해서 월정사 법당이 불타버린 터라 가건물에서 예불을 하고 생활을 했다. 지암智庵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나 은사를 시봉하면서 보낸 행자생활도 아닌 데다가, 출가한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계를 받았기 때문에 나의 행자시절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월정사에서 나무하러 다니고 밥하던 기억 말고는 크게 떠오르는 추억이 없다.
고생해가면서 초발심을 다지고 승려로서의 틀을 세우는 시기가 행자시절이라 한다면, 내게 행자시절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그만 암자에서 도반 몇이 수행정진하던 저, 젊은 날의 몇 철이 아니었을까. ‘이번 결제에 들어가면 죽어서 나오든지 성불해 나오든지 해야겠다’ 결심하면서 들어갔으나 번번이 ‘아자득몽啞子得夢’으로 그쳤던 그 시절 말이다. 벙어리가 꿈을 꾼 것처럼 알긴 알 것 같은데 말이 안 나오던 그 애타던 시절이 내겐 풋풋한 초발심의 행자시절과 다름없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두 해 전에 열반한 청화 스님,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도반인 도륜 스님 이렇게 셋이서 대흥사 진불암에서 수행할 때다. 우리는 삼총사라고 불릴 만큼 서로 마음이 잘 맞아 오랫동안 수행을 함께 했다. 당시는 한 방에 앉아서 정진을 하지 않고 방을 따로 쓰면서 각자의 방에서 정진을 했다. 하루 일종식을 하기로 하고 정진을 시작했는데, 나는 처음 해봐서 그런지 배가 고파서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으니 밤새 앉아 정진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죽 끓여 하루 한 끼 먹고 담요 한 장 가지고 한겨울을 났다.
그래도 아침에 죽을 끓이면서 아궁이에 불을 넣어놓으면 하루 종일 방은 따뜻해 옷을 얇게 입고 앉아 있어도 추운 줄은 몰랐다. 온 종일 정진하고 나서 따스운 물에 발을 씻고는 또 앉아 있었던 그 시절,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어느 날 깜빡 잠이 들었다가 일어났는데 도량석 할 시간이 넘어 있었다. 도량석을 맡고 있었던 나는 ‘아, 내가 늦었구나’ 하고는 목탁을 찾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도량석을 마치고 법당에 들어가 예불을 다 마치도록 아무도 기척을 하지 않았다. 피곤해서 못 나왔나 보구나 하고 방으로 들어와 좌복 위에 앉아 정진하고 있으려니 아무리 앉아 있어도 날이 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청화 스님의 맑은 도량석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뿔사! 내가 시간을 잘못 알고 너무 빨리 도량석과 예불을 해버린 것이다. 들어오는 시주 하나 없이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으니 시계 하나 변변한 게 없어서 일어났던, 지금도 미소가 피어오르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올해 일흔여덟인 나는 지금 그때 함께 정진했던 도반인 청화 스님의 사진을 내 방문 위에 걸어놓고 있다. 그리곤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그를 한 번씩 바라본다. 장좌불와를 멈추지 않고 눈 푸르게 정진했던 사람, 상좌에게도 싫은 소리를 못할 만큼 성품이 유순했으나 정진할 때만큼은 가차없이 인정을 끊고 지독하리만치 수행에 몰두했던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함께 한철을 나기 위해 암자에 도착하면 그날부터 천 년이라도 살 것처럼, 허름한 도량 구석구석을 치우고 손질해 청정한 도량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는 한 철 이상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나고는 했다. 무엇 하나에도 집착이 없어야 하는 수행자의 삶을 실천한 것이다.
벽송사에서 함께 한 철을 났던 어느 한 스님이 ‘내가 도인이 아니라서 그가 도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진 하나는 이 나라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존경한다’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선지禪旨로나 학문적으로나 그만한 사람이 드문 것은 젊은 시절부터 저리 혹독하게 정진했던 그 힘이 아니겠는가. 행자시절은 물론 한평생 내 수행의 길에 있어 잊을 수 없는 도반이요 동지인 그를 날마다 만나면서 나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처럼 중노릇은 안 할 것이다. 사회학도 마음껏 공부하고 마음공부도 한껏 해서 세계를, 전 인류를 향해 법문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만행을 많이 했다. 지금처럼 차를 타고 다니는 그런 만행이 아니었다. 어떤 계획이나 목표가 있는 만행이 아니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노자가 떨어지면 탁발하고 유숙할 데가 없으면 길거리에서 자면서 홀로 돌아다닌 길이었다. 낙엽 지는 깊은 가을, 만행하다 지친 발을 산속 계곡물에 담그고 앉아 있으면 까닭 모를 눈물도 흘렀고, 뉘엿뉘엿 해 지는 들판 한가운데에 서서 저 멀리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오늘밤은 어디서 잘 것인가,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자문하는 만행을 많이도 했다.
그러나 다음 생엔 전 세계를, 전 우주를 누비고 다니면서 만나는 이들에게 그리고 전 인류를 향해 법문으로 포효하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자유로운 삶인가! 수행을 하는 것은 어떤 고정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고정된 사유에서 벗어나야 천지에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 틀 속에 갇혀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 단하선사가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불木佛을 들어내 태워버린 것처럼 종교적인 신성마저도 뛰어넘는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 선이요 수행이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해서 마음을 넓혀야 한다.
모름지기 종교인은 시대의 선구자 역할을 해야 한다. 중생을 교화하고 지도를 해나가야 한다. 지금 수행자들은 ‘나는 과연 그러한가’ 하고 한번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진리를 추구하면서 바른 신앙인, 바른 종교인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참사람인지 돌아봐야 한다. 수행자란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진리로써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이다.
옛 사람은 말하였다.
“만약 선정의 힘이 없으면 죽음의 문에서 복종당하고 앞이 캄캄하여 갈팡질팡할 것이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