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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 금종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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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5년 10월 284호
천은사 주지 금종 스님은 이순耳順이 지났음에도 마치 어린아이 같다. 누구나 스님과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천진난만한 성품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출가자는 일정부분 출가할 때의 나이에 머물러 있다고 하더니 스님에게서 언뜻언뜻 열세 살 소년을 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절로 향했다. 절이 좋고 스님이 좋았다.
아홉 살에 출가한 누나를 따라 대성암이라는 절에 갔을 때 스님은 비구니스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절에 살겠다고 떼를 썼지만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내려와야 했다. 위로 누나가 셋, 어렵게 기도해 얻은 장남이 절에서 살겠다고 하니 가만히 둘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졸업하면 절에 보내줄게’ 하던 아버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스님은 초등학교 졸업식 다음날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후에 동생 ‘후야’까지 출가했으니 삼남매가 출가한 셈이다.
열세 살, 그 어린 나이가 부모님 곁을 떠나 절을 택한 것을 보면 중팔자를 타고난 것이라고 스님은 말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48년 동안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누나 스님 곁에 있던 어린 동자승은 비구니 절에 계속 있을 수가 없어 동산 스님이 계시는 부산 범어사로 갔다. 그리고는 얼마 있다가 다시 울산의 태화사 우룡 스님에게 보내졌다.
우룡 스님은 함께 누워 자다 갑자기 허벅지를 꼬집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면 그 소리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서 그 소리가 처음 나온 곳을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스님은 후에 그것이 화두임을 알 수 있었다.
우룡 스님의 스승은 당대의 대강백으로 잘 알려진 고봉 스님으로 스님은 그분 밑에서 한문과 천수경, 목탁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인데, 당시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저녁만 되면 팔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 것이 그리도 싫었다.
우룡 스님 출타중에 객스님 두 분을 따라 나선 곳이 대둔산 태고사, 이곳에서 스님은 현재 천은사 조실스님이자 조계종 원로의장인 종산 스님과 만나게 되었고, 종산 스님의 은사스님이신 도광 스님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종산 스님과는 사형사제 관계가 되었다.
종산 스님은 사형이긴 해도 나이로 치면 20년 가까이 차이가 나 은사나 다름이 없다. 태고사에 올 때면 언제나 절 부처님보다 동자승이 더 보고 싶어 온다고 할 정도로 금종 스님을 귀여워했다.
금종 스님은 종산 스님을 ‘생불’이라 말한다.
어느 날 현재 살고 계시는 청주 보살사에 밤손님이 들었는데, 하루 2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는 스님이 새벽녘에 밖에 나왔다가 밤손님과 마주쳤다. 그러자 종산 스님 왈 “오늘은 신도가 별로 없었는데…” 하며 안타까워 했다는 것이다.
도광 스님을 따라 담양의 보광선원으로 간 스님은 그곳에서 그리도 고대하던 수계를 받았다. 집을 나서 절에 온 지 5년 된 해로 스님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도광 스님은 엄하고 검소한 분이셨다. 설거지하다 밥알 하나라도 나오면 물에 씻어 주워먹어야 했다. 밥알이 많이 나오면 국에 넣어 끓여 먹었다. 누가 소포를 보내오면 물건 싼 끈을 칼로 끊어내는 법이 없이 조심스레 풀어 모아두었다가 다시 사용하였고, 종이는 곱게 접어두었다가 뒤집어 사용하곤 하였다. 보고 자란 것이 그러한 모습인지라 스님 역시 검소함이 몸에 배어 노끈 하나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
보광선원은 농사를 많이 지어 먹을 것은 풍부한 절이었다. 그런데 일이 많아 스님들이 가끔 도망을 가곤 했는데, 금종 스님 역시 새벽에 도망을 시도하다 붙잡혀온 적도 있다. 그럼에도 은사스님은 금종 스님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분이셨다.
은사스님은 금종 스님을 특별히 아껴주시었다. 어리고 약한 상좌에게 궂은 일보다는 손쉬운 일을 시켰고 곁에서 늘 시중들도록 하였다. 그러다보니 다른 상좌들의 질시의 대상이 돼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은사스님은 항상 희망과 용기를 주셨다.
“종권아(스님의 법명, 금종은 법호), 천사람이 천가지 말을 하고 만사람이 만가지 말을 해도 너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일체 다른 마음 먹지 말고 무명을 밝히는 데 힘쓰거라 알겠느냐?”
어디 이 뿐이랴,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열거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사랑이 지금까지 스님이 오롯하게 수행자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준 힘이었다. 그 크신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스님은 십년간 스승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러고보니 스님은 어려서부터 귀여운 외모와 천진한 성품으로 주위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고 자라왔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깨달음을 얻겠다며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을 찾아나섰다.
남방의 양산 통도사 경봉 스님, 해인사 성철 스님, 북방의 용화사 조실 전강 스님, 순천 송광사 구산 스님, 나주 다보사 우화 스님, 백양사 석호 스님(서옹 스님), 경기도 망월사 춘성 스님, 월내 묘관음사 향곡 스님 등 큰 스님들 회상을 두루 돌았다.
그러나 선지식들 밑에서 한 철씩 공부를 했으나 마음이 시원치가 않았다. 그러다 《선요》를 보다가 중국의 고봉 스님이 쓴 글이 마음에 와닿았다.
‘수행자가 공부를 하고 싶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5가지 조항을 지키면서 수행을 하되 3년이 되어도 성불을 못하면 내 거짓말한 죄로 발설지옥에 빠질 것이다.’
스님은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 부처님 흉내라도 내보자 하는 생각으로 결사를 결심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반야봉 쪽으로 3km 더 들어가면 문수대라는 암자가 있다. 금종 스님은 그곳을 찾아가 문 앞에 고봉 스님이 말한 5가지 조항을 붙여놓고 홀로 3년 결사에 들어갔다.
“3시간 이상 자지 말 것, 3홉 이상 먹지 말 것, 일체 문학을 멀리할 것, 일체 말을 하지 말 것, 산문출입을 금할 것.”
3년 결사를 마쳤으나 그래도 마음이 열리지 못했다. 스님은 재충전하는 기분으로 다시 반야봉에서 4km 정도 떨어진 묘향대에서 다시 3년간을 더 살았으나 여전히 미진한 듯해 송광사 구산 스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구산 스님은 자신이 공부해서 득력을 입었던 광양의 백운산 상백운암 토굴을 일러주셔서 거기서 다시 3년 결사를 하였는데 그곳에서 스님은 마침내 마음의 안식처를 얻었다.
9년 결사의 결실이었다.

수행은 스님의 말문을 열어주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스님은 스스로 말주변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 앞에 나서면 주눅이 들고 얼굴이 붉어지곤 했는데, 그런 것이 일체 없어졌다.
경찰서, 구치소, 재소자 등 사회의 어두운 곳을 찾아 법문을 시작했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우렁차고 또렷하며, 쉽게 표현해 많은 사람들이 스님 법문을 좋아했다.
부산 해광사에 머물 당시 우연한 기회에 부산 불교방송의 프로그램 진행도 맡게 되었다.
<금종 스님의 참나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프로였는데 인기가 최고였다. 자갈치 시장의 아줌마들, 택시운전기사들, 공장에서 일하던 일꾼들로부터 말씀을 정말 잘 듣고 있다는 찬사가 쇄도했다. 스님의 말씀은 딱딱하지 않고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 재미가 있어 중년의 나이 든 불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천은사 주지로 부임해 와서는 광주불교방송에서 1년간 같은 제목으로 진행하였는데 역시 반응이 좋았다.
스님 개인적으로는 방송이 그동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내용들을 모아 책으로 펴내기까지 했다. 책 제목은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어린 시절 출가한 때로부터 수행 이야기, 다양한 경험들을 담아 자서전이라 해도 좋을 법하다. 9월 초에는 천은사에서 출판기념 법회도 열었다.
스님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누구나 찾아와 만나기를 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보통 큰절 주지스님들은 신도들이 만나기가 별따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지만 스님은 절에 없지 않는 이상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함께 차도 마시고 법문도 들려준다.
그런데 행정에 있어서는 문외한이란다. 그래서 사찰의 주지는 사실 맞지 않는 것 같다고 고백하듯 털어놓는다.
처음 주지로 부임해 와서 스님은 호되게 앓았다. 거의 죽다 살아났다고 한다. 그만큼 직책이 버거웠던가 보다. 토굴에서 수행만 하다 대중과 함께 생활하며 해보지 않던 일을 하자니 어려움은 당연하리. 그래도 지금은 한 고비를 넘겨 몸도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러나 이런 일을 계속할 생각은 더 이상 없단다.

천은사에는 대중이 많은 편이다. 승가 재가 합하여 30여 명이나 된다. 그리고 흔치 않게 노스님의 비중이 높다. 상시 살고 계신 분이 5~6명이고 왔다갔다 하는 분까지 합하면 열한 분이다. 천은사 주지로 오면서 금종 스님은 노스님 모시기를 자처했다.
세속이나 승가나 나이 든 분들을 모시고 살기를 꺼리는 세태에서 스님의 마음이 아름답고 고맙기만 하다.
천은사도 앞으로의 계획이 많다. 더 이상 관람료 수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들이 커져가면서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템플스테이나 단기출가도량 같은 산사체험공간 마련도 생각하고 있고, 시민선방도 고려하고 있다. 아직은 계획단계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금종 스님은 전에 없이 생각이 많다.
천진한 감성으로 숨어버린 샘물을 찾아내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