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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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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타 - 박재은 2005년 10월 284호
절 다니는 기쁨 가운데 하나는 법당에서 나와 마시는 ‘물맛’이다. 요리를 한다고, 맛은 좀 안다고 난 체를 했어도 ‘물맛’조차 제대로 모르던 나였다. 그런데 법당에서 삼 배, 이십일 배, 백팔 배를 하고 나와 졸졸 흐르는 절집 물을 마시면서, 절집마다 물맛이 다 다름을 깨달으면서 ‘물맛’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꿀꺽 급하게 넘겨버리면 그 맛이 다 그 맛 같아도, 입안에 잠시 머금었다가 삼켜보면 한 번도 같은 맛이 없으니 신기하다. 유난히 매끄러운 물이 있는가 하면 쌉쌀한 뒷맛이 남는 물이 있고, 그냥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있는가 하면 굉장히 묵직하게 혀에 남아 표주박으로 한 번 이상 떠먹지 못하는 물도 있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베르나르 루아조(Bernard Loiseou)라는 프랑스 조리장을 직접 인터뷰 한 적이 있다. 수십 년을 주방에서 보내며 프랑스 전통 요리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요리사답게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인정받는 장인 중 하나였고. 그의 생전에 우연히 이뤄진 인터뷰에서 나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었는데 바로 “당신은 왜 파리에서 요리를 팔지 않나요?”였다. 이어진 그의 답변. “파리의 물은 좋지 않아요. 이곳 부르고뉴는 내 고향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에서 물맛이 가장 좋답니다.” 프랑스 요리는 소스와 육수가 관건인데 소스와 육수는 물맛이 좌우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이처럼 물맛이 좋은 부르고뉴 지방은 세계 최고의 와인 산지이기도 하다. 포도주는 술 한 방울 안 넣고 물 반, 포도 반으로만 만들어지는데 물이 워낙 맛있는 동네이니 포도주 또한 맛있을 수밖에. 그리하여 또 유명한 것이 바로 와인 식초다. 발효된 와인을 더 발효시키면 산화가 이뤄지면서 초산이 만들어져 곧 식초가 된다. 알코올이 이미 다 날아간 와인 식초는 그 맛이 진해서 샐러드 야채에 솔솔 뿌리고 약간의 과일즙과 올리브기름 그리고 소금, 후추로만 간을 해도 멋진 맛이 난다. 물론 와인 식초 말고도 맛좋고 몸에 좋은 식초는 셀 수 없이 많지만. 내가 워낙 신맛을 즐기기 때문에 유난히 식초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말이다. 감 식초는 아침마다 물에 타서 마시면 장운동을 돕고 활력을 준다. 사과 식초는 특히 비타민 C가 풍부하여 피부 미용에 좋고 갈아서 만든 사과 주스에 꿀이랑 함께 넣으면 사과 맛이 더 부각된다. 현미 식초는 달지 않아서 밥을 비비거나 국수를 양념할 때 등 탄수화물과 어울리도록 하면 좋고, 레몬 식초는 맛이 가벼워 야채나 생선을 다룰 때 이용하면 풍미를 해치지 않는다. 흔히들 식초는 새콤한 음식에만 쓰인다고 생각하지만 중국요리처럼 느끼한 음식에 한두 방울 떨어뜨려주면 더욱 입맛이 돌게 할 수 있다.

야채 초밥
식초를 이용할 수 있는 요리를 하나 얘기할까 하고 보니 역시 만만한 것이 밥 요리다. 밥에다 단 초물이라 부르는 식초와 설탕과 소금을 녹인 물을 섞어 고슬고슬 비비는 게 떠오른다. 이 밥이 ‘초밥’의 기본이 되는데, 밥이 뜨거울 때 비벼서 조금 식힌 다음 쓰면 된다. 출장 요리사이기도 한 내가 채식주의자 의뢰인을 만났을 때 곧잘 써먹는 메뉴는 바로 ‘야채 초밥’. 방금 설명한 단 초물에 비빈 밥에 알맞게 절인 야채를 얹는 것이다. 이에 적합한 야채는 잘 무르지 않아야 하고 게다가 씹는 맛까지 있다면 더 좋다. 예를 들어 도톰하게 썬 표고버섯이나 새송이 버섯, 단 호박이나 어린 당근, 오이나 브로콜리 혹은 무나 가지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데, 만드는 법이 아주 쉽다. 도톰하게 썬 야채를 설탕 섞은 식초에 절여 숨을 좀 죽이고, 건져서 물기를 뺀 다음 쓰면 된다. 단, 야채 초밥을 만들 때 밥을 비비는 단계에서 단 초물 외에 몇 가지가 더 들어가는데 맛의 밸런스를 위해서다. 밥과 야채에 모두 식초가 쓰이게 되므로 전반적으로 너무 시어질 수 있어서 참기름, 깨 그리고 김 가루를 넣게 된다. 초물에 이미 설탕과 소금간이 있었고 여기에 고소한 참기름과 깨맛, 담백한 김 향이 잘 섞인 밥을 한 입 크기로 꼭꼭 빚어내고(여기까지는 주먹밥을 생각하면 된다), 그 위에 초절임해둔 야채를 하나씩 올리면 완성된다. 쉽게 말하면 주먹밥을 먹고 상큼한 단무지 혹은 백김치를 한 조각 먹는 격인데,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제법 고급스러운 요리같이 보여서 입맛 없는 가족들이나 갑자기 찾은 손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 재료를 보면 알겠지만 다이어트에 좋은 메뉴이기도.
주말에 절을 찾으면 유난히 공양 시간에 사람이 많아 보인다. 공양을 들고 나오는 이들을 가만히 보면 불자가 아닌 사람들도 꽤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들은 대부분 ‘절밥’이 맛있어서 들른다고 고백한다. 온갖 산해진미로 가득한 절 밖의 밥은 왜 맛이 덜할까? 중금속이 섞인 수돗물을 마시고 욕심을 잔뜩 얹은 식단을 급하게 먹느라 일상 중에 먹는 밥이 심신에 독이 되는 거다. 내 몸이 절에 있든 절 밖에 있든 간에 좋은 물로 천천히 목을 축이고, 식초 몇 방울로 건강을 지키며 마음을 비워 조석으로 절을 하다보면 집 밥도 절밥처럼 좋은 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