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지 말라. 그 죽음이 고통이니라. 莫生兮其死也苦태어남과 죽음에는 모두 필연코 크고 작은 헤어짐이 있어 삶이란 즐거운 일만은 아닐 것인데, 중생은 그 짧은 길에 헤어짐은 잊고 봉생逢生의 즐거움만으로 그 버거움을 쉽게 잊고 살아간다. 계절은 어느덧 화려한 단풍으로 헤어짐을 준비하지만, 눈앞의 화려함에 떠나는 고통은 아직도 강 건너 일이 되어버린다.
생사의 고리에서 벗어남 없이 어찌 태어나지 않을 방법이 있을 것이요, 이왕에 태어난 이 몸으로 또 다른 여행을 떠나지 않을 방법이 있을 것인가. 오래 전 원효 스님의 당부가 가을의 중턱에 앉은 범부에게는 참으로 가당치 않다.
오곡五穀과 백과百果로 혹은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는 그 가을은 이제 한 가닥의 미련도 남기지 않으며 앙상한 골격을 드러낼 것이니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을 준비하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무상無常한 저 달도 때가 되면 또 차오르지 아니하던가. 그러하니 가을밤 남쪽 창에 내려앉은 휘영청 흰 달빛을 두고 가버렸다 말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
바위에 걸터앉아 가는 바람을 맞이하며 멀리 흐르는 긴 강물을 바라보니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호걸의 용맹의 자취도 달빛만큼이나 아련하고 절세 가인佳人의 아름다움도 남은 것은 이름뿐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만큼 허망하다. 그러니 남은 것은 오히려 달빛이다. 그러니 인생을 두고 꿈이 아니라고 크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고 가는 길에 목숨 걸어 애써 화려함을 치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는 대덕大德의 가르침을 빌리지 않고도 그 달빛에 의지하면 알 수 있다.
성긴 숲속에 밝은 달빛(소림명월疏林明月)이라 치장을 덜어낸 그 숲에 달빛이 가득 찼다. 봄에서 여름으로 무성했던 나뭇잎은 태양과 함께 지평선 너머로 침잠하니, 잎이 차지하고 있던 그 빈 공간을 달빛이 채우고 있다. 예로부터 잘 된 그림을 평가에 있어 성김과 빽빽함(疏密)의 조화는 중요한 덕목이었는데, 성긴 가운데 빽빽함(疏疏密密)이 있고, 빽빽함 가운데 성김(密密疏疏)이 있어야 음과 양의 조화를 득의得意한 그림이었다.
김홍도의 소림명월의 화폭에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풍성한 달빛이 채우고 있으니 소밀疏密의 원칙을 충실하게 적용하여 화격畵格을 높였다. 여기에 더하여 부드러운 달빛과 까칠한 나뭇가지의 조화로 율동감 있게 화면을 중도中道로 이끌어 그림에 속된 기운을 담지 않았다. 일탈의 즐거움이야 사람 살아가는데 양념의 역할을 할지라도 일탈로 그 평생을 삼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림 역시 정직하고 담담한 가운데 그 맛이 우러나야 그 여운이 오래 간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하는 화가의 붓질이 돋보이며 평상심이 곧 도道라는 가르침 같이 그림에도 역시 평상심이 그 중심에 서야 아름답다.
단원의 그림은 노련하다. 그림 속의 그의 필선은 노련하지만 기름지지 않다. 오히려 단원 그림의 맛은 칼칼하고 까슬한 가을바람의 느낌이다. 그의 붓질이 노련하다는 것은 그의 평소의 노력을 보여주는 결과이다. 그림으로 업을 삼았으니 그림 그리기는 평상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교를 따르지 않고 일탈을 일삼지 않았으니 그가 기교와 일탈로 얻어지는 결과를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생의 가을에서 얻어진 담담한 달빛이 화가의 창에 가득했을 일이다. 화폭의 달빛을 방 안에 들이고, 서창西窓에 가을 바람 한 폭을 담는다. 선禪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는 것이라 화가의 달빛도 내 방 안에 들여야 제대로 된 감상이다.
마조도일(馬祖 道一:709~788) 화상이 어느 날 한 스님을 시켜 경산법흠(徑山 法欽:714~792) 스님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속에는 일원상一圓相이 그려져 있었다.
경산 스님은 뜯자마자 붓을 찾아 가운데 한 점을 찍었다.
그 뒤 어떤 스님이 혜충 국사(慧忠國師:?~775)에게 이때의 일을 말씀드렸더니 국사께서 말하기를 “법흠 스님이 오히려 마조 대사에게 속았구나” 하였다.
동양에서의 그림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 그림을 몸으로 느끼고 경험한다. 그림을 그린 화가와, 그림을 감상하는 이, 그림 속의 인물이 모두 그림 속 풍경에서 하나를 이룬다. 그러므로 마조 대사의 일원상은 화면 속의 일원상이 아닌 이미 내 마음 속의 일원상이다. 하지만 여기에 붓을 들어 점을 찍는 순간 마조 대사의 일원상은 그저 종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종이와 나 사이에 너무나도 먼 절벽이 생기고 만다. 선은 바라다만 볼 일이 아니라 내 발등 위에 붙은 불이다.
앞서서 하릴없는 원효 스님의 당부는 이렇게 답을 준다.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라야 一切無碍人
단번에 생사를 벗어나리라. 一道出生死
-<화엄경 명난품>-
달빛이나 햇빛이나 걸림이 없다. 또 계절의 발걸음을 무엇이라서 잡을 것인가. 만물은 쉬임없이 흘러가고 강물은 걸림이 없건만 세상을 살아가는 중생의 걸음 걸음에 걸리는 풀과 돌들은 무엇으로 들어 나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