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공부를 하겠다고 여기저기 선생을 찾아다니던 오랜 친구가 고단한 얼굴로 찾아왔다. 하늘은 푸르고 산은 깊어 보이던 가을 어느 날이다. 이 산 저 산 여러 해 산과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는 말을 바람결에 전해 들었건만 마음은 고단해만 보인다. 몸은 무거워만 보인다. 나란히 산을 오른다. 해발 400m를 약간 넘는 낮지 않은 산이다. 높지도 않은 산이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위로와 안식이 되어 주는 산이다.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나처럼 띄엄띄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어울리는 산이다. 산이 사람을 닮아주는 것인지 사람이 산을 닮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산은 우리 같은 어리석은 인생길을 가만히 품어준다. 늘 보듬어준다.
숲이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숲은 내 마음을 채울 만큼 충분히 깊다. 내 마음이야 사실 분꽃 하나라도 충분히 채울 것을, 숲이야 과분하다. 과꽃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가을이면 생을 마감하는 봉선화 한 송이만으로도 분에 넘친다. 봉선화 한 송이가 아니라 꽃잎 한 장만으로도 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고 그리움으로 가득 찬다. 이제 제 생을 마감하고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리움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에 눈물이 가득하다. 슬픔과 그리움만 가득 차는 것이 아니다. 설렘과 기다림도 가득 찬다. 떠나갈 삶이 애달프기 때문이고 다시 피어날 봄이 가슴 벅차도록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숲 가운데로 난 길로 들어선다. 가을이다. 가을 숲은 언제나 그리움과 회한과 아쉬움과 설렘과 경외심으로 충만하다. 하늘과 땅의 마음이 같아져 생명이 요동치던 봄날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새싹을 틔우던 날, 모진 겨울을 이기고 새순이 움트던 날, 그날의 벅찬 환희에 대한 그리움이다. 지난 여름 무성한 숲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다. 생의 절정기를 보내며 느끼는 늦여름과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다. 결실에 대한 설렘이다. 겨울을 맞고, 다시 봄을 맞을 다가올 날들에 대한 경외심이다. 충만한 기운들이 우리를 감싼다.
그저 말없이 길을 걷는다. 길이라고 다 같은 길은 아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어도 마음길을 따라 걷는 이도 있고, 산길을 따라 걷는 이도 있는 법이다. 같은 길이 앞에 놓여 있어도 가보았던, 늘 다녀 눈에 밟히는 익숙한 길도 있고 가보지 않은 길도 있는 법이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길이 아닌 것은 아니다. 길이다. 마음을 따라 걸으면 모든 곳이 길이다. 이 세상 천지에 길 아닌 곳이 어디 있으랴. 마음공부 하는 길이 따로 있으랴. 제 사는 곳에서 울고 웃고 어수룩하여 골탕먹고 마음 찢어지고 눈물 그칠 길 없는 아픔에 절면서도 제 사랑을, 마음의 사랑을 잃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마음공부이지.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모두 마음공부이지. 마음공부야 어차피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여기에 있던 이 산 저 산 다녔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별 의미가 없는 것을. 이 산 저 산 다녔다고 마음공부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이 산 저 산 다녔음에도 마음공부가 안 되었다고 상처 받고 절망할 일도 아니다. 씨 뿌려진 그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것을 마음공부 하겠다고 마음을 빼앗겨 제 있을 자리만 잃어버렸다고 회한에 젖을 일도 아니다. 사실, 제자리라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발길 머무는 곳이 제자리이기도 한 것을. 마음 길 따라 걷다 마음 머무는 곳이 생명들이 생명답게 살아가는 땅인 것을. 살아가야만 하는 땅인 것을 말이다.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생인 것을.
그래, 마음은 좀 편해졌니?
이렇게 묻고 싶은 마음을 숲길 가운데로 손 내밀은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오라는 이도 없는 산길을 걷는다. 말없이 걷는다. 길 곁 나무 아래 마삭줄이 풍성하다. 초설이다. 가을 숲에 벌써 첫눈이 내린 듯 잎마다 희끗희끗하다. 유난히 반갑다. 말없는 친구의 동행이 꽤나 허전했나 보다. 친구의 허전한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하는 놈이 무슨 마음공부냐고 위로 삼아 한 소리 하고 싶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초설을 보며 위로를 받기로 한다.
너는 네 마음을 알겠니.
때맞춰 바람이 부는가. 참으로 초설이 대답을 하는가. 초설이 작은 잎들을 앞뒤로 흔들어대며 요란스럽게 대답한다.
제 마음을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저도 제 마음 몰라요.
그저 그때 그때 마음을 느낄 뿐이에요.
때론 그래서 슬프고 때론 그래서 기뻐요.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마음을 아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니.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일이니. 그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일이니. 그래서, 마음은 밖에서 얻는 것으로는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들어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훌륭한 일이니. 마음이란 몸 안에도, 몸 밖 어디에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비로우니. 마음이란 가을 숲길에서 지천으로 밟히는 나뭇잎 한 장, 제 할 일 다 마치고 버려진 낙엽 한 장에도 충만하게 깃든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니.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마음을 밖에서 찾으려 하는구나.
참으로 바보 같은 일이다. 어리석은 일이다.
앞서 걷는 친구의 빈 등을 바라본다. 나뭇잎의 그림자들이 가지와 어울려 그의 등에서 분주하다. 그 사이로 비추는 가을 햇살들이 그의 앞에 그림자를 만든다. 그 모습들이 그의 삶을 닮은 듯하다. 슬픔이 인다. 괜스레 눈물이 난다.
아무래도 내 마음의 길은 눈물로 젖어 있는가 보다.
빈 등만 바라보아도 눈물이 나니 말이다.
산사도 없는 낮은 산자락을 걷는 내 마음에 산사의 종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나뭇잎 바람에 흔들리며 우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친구의 울음소리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