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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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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이겸 2005년 08월 282호
물이 담긴 스프레이를 ‘후욱~’하고 뿌리면, 쪼개진 고운 물 알갱이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처럼 차창에 내리는 뿌연 안개. 쌀뜨물 같은 안개가 가득한 오르막길을 간다. 안개가 뭉쳐 빗방울처럼 흘러내리는 차창 너머로 보현암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은 1973년 혜춘 스님이 세운 비구니 수행 도량이다. 역사로 따지자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보태져 높은 산을 오르게 되는 이치니 만만하게 볼 시간은 아니며, 오래 된 나무가 다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을 보면, 이곳은 수행처로서의 청정함을 더 눈여겨보아야 하는 곳 같다. 대웅전이 작고, 선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절집. 마당엔 ‘심心’자 연못이 보인다. 몇 개의 큰 통돌과 한 아름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연못엔 보현암과 나이가 같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물고기처럼 한시도 눈을 감지 말고 정진 하라는 뜻에서 연못에 둔 것일까?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암자의 왼쪽으론 가야산 줄기가, 오른쪽으론 매화산 줄기가 뻗어 내린다. 마당 아래 경사진 텃밭엔 운력으로 돌본 채소들이 싱싱하게 자란다. 텃밭을 서성이다 평소 그냥 지나쳤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공양’에 대한 생각이다. 당연한 일처럼 여기고, 놓쳤었던 것이었다. 농사를 짓는 것도, 밥을 짓는 것도 모두 정성이 들어가야 좋은 성과를 보게 된다. ‘논’을 처음 본 초등학교 여름방학, 외갓집에서 보낸 여름 한 철이 아직도 마음에 살아 있다. 발가락 사이를 뚫고 들어오던 부드러운 흙과 ‘분’같이 곱게 만져지던 감촉을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사진을 찍으며, 농부들과 나누었던 가슴 시린 이야기도 잊을 수 없다. 농사짓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 않음에도 가을 논두렁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이 얼마나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던지…… 하물며 농사를 천직으로 삼고 있는 이들의 마음은 또 어떠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농부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며, 그들의 수고스러움을 상상할 뿐이다.
일 년 농사를 지어 수확한 쌀이 밥상에 오르면,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시간에 쫓기며 허겁지겁 넘긴다. 긴 어둠을 뚫고 빛을 찾아 흙 위로 모습을 드러낸 싹. 따가운 갈증과 태풍을 이겨내고, 병충해까지 견뎌낸 쌀 한 톨을 생각하며 밥그릇에 수저를 넣은 적은 없었다.

새삼 텃밭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일어난다. 매일 보는 밥이고, 먹는 밥인데 왜 이러한 생각을 쉽게 지나쳤었을까?
어느 암자에서 처음 먹었던 검정색 발우에 담긴 밥이 생각난다. 그땐 밥그릇이 왜 그리 깊게 느껴졌을까? 정말로 공양이 담긴 그릇이 우물같이 깊어서 퍼올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시간만큼 고마움을 느끼게 될까? 고마워해야 할 것들이 이뿐 아니라, 주변에 너무도 많으니 어떻게 밥값을 해야 하나…… 우선은 ‘밥’과 ‘찬’과 ‘밥을 짓는 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