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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이어온 서원, 천년을 함께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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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이야기 - 진우 / 해인지 편집위원 2005년 08월 282호
서원대각간誓願大角干……
중화삼년中和三年……
결제날 개금을 위해 복장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이 명문은 1122년이 지난 올 여름철 하안거 나의 화두가 되어 버렸다.
고미술사학자도 아니고 국어학자도 아닌 내가 관심이 남다른 것은 오로지 부처님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처럼 30자가 안 되는 문장이지만 천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묵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천박한 지식이라 결국엔 또 하나의 억지스런 추측성 글이 될지 모르나 조성에 참가한 불모佛母나 동참한 시주님들이 염원하던 바를 잘 이해하고 이에 대해 축원하는 것이 이처럼 아름다운 부처님을 후손들에게 물려준 고마운 마음을 조금은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이 명문을 해석함에 있어 두 가지 측면으로 접근을 해보려고 한다.
첫째는 화염경의 비로자나 부처님이라는 불교 교리적 측면, 두 번째로는 신라 말기라는 시대적 측면이다. 명문은 서원부분과 연대부분으로 2열로 쓰여져 있다.
중화삼년中和三年으로 시작하는 연대부분의 해석에는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굳이 덧붙이자면 칠금착성柒金着成의 해석은 금을 칠하고 뒤 명문판을 덧대어 완성하였다로 해석함이 더 명료해질 것 같다.
논란과 이견이 많은 서원부분이다.
쓰여진 글자는 빼지 않고 없는 글자는 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해보면
첫 번째 해석으로 “서원하옵나니. 대각간님께서 자신을 밝히시어 은혜로 가득 채우시고 오른쪽 자리의 왕비님께서 자신을 밝히시고……”
두 번째 해석으로 “서원하옵나니 대각간님의 등불 몸 은혜로 충만하시고 오른쪽 자리의 왕비님의 등불 몸도……”로 해석을 하여 보았다.
짧지만 완벽한 발원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명문이다.
서원誓願은 맹세하고 바라옵노니로 해석한다.
다음은 서원의 내용이 나오고 있다.
등신사미燈身賜의 네 글자의 해석이 구구하다.
등燈1)은 신라말 유행을 하던 60권 화엄경 입법계품엔 명등신明燈身이라는 문구가 한 번 나온다.
비로자나 부처님을 대일大日여래라는 한자로 번역하듯이 빛은 무명을 일시에 소멸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항상 광명정대한 빛을 삼천세계에 나투시는 부처님에 대해 중생들은 3아승지겁을 수행한 후에야 불과佛果로써 증득을 하고 그 밝기도 공덕과 수량이 각각이다. 그래서 등登이라 했을 것이다.
등신燈身, 자신을 밝힌다.
이는 수행인에게는 오도悟道이겠지만 정치인에게는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나타낸다.
전륜성왕으로 등극하는 것은 정치인 대각간과 비에게는 왕으로 즉위하는 것이 등신의 의미가 아닐까?
성불成佛을 하신 후에 중생을 구제하신 것처럼 왕으로 즉위하였으면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사미 은혜로움으로 가득 채운다.
복과 지혜를 구족하신 부처님께서 자비광명을 베푸시니 온 삼천세계가 불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로 가득 차는 것처럼 임금에 즉위하여 선정을 베푸니 온 세상, 이 국토가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 찰지어다.
등신燈身이 자신을 밝히는 지혜의 측면으로 상구보리라면 사미는 중생을 이익케 하는 회향 대행의 측면이 하화중생이다.
왕위를 꿈꾸던 이들이 대승보살의 원력이 아닌 개인적인 소망이라면 “서원하옵노니 대각간님의 등불 몸이 은혜로 가득하시길”로 해석해도 되지만 아무래도 시원칠 않다.
우좌비주등신右座妃主燈身, 우좌의 해석은 법보전 부처님 복장공간구조의 특이성을 이해해야 한다.
옆 사진에서 보듯이 주부공간에 대해 오른쪽 가슴부위에 별실이 조성되어 있다.
주부인 중앙통이 대각간의 공간이고 이와 함께하는 비妃의 공간이 오른쪽 자리 우좌右座 아닐까?
만약 이들이 연인관계였을 거라면 천년이고 함께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리고 수습된 복장물 중에 후렴통도 하나인 것 같지만 상하로 아래것이 크고 윗 것은 작은 2개로 구성되었다.
혹 동치 12년 개금하는 과정에서 하나로 모아진 것은 아닐까?
“오른쪽 자리의 왕비님께서도 자신을 밝히시어……” 나머지 글자는 불가능하게 쓰여져 있다.
두 사람은 누구였을까?
특이하게 신하의 칭호인 대각간이 왕비보다도 먼저 거명되고 있다. 분명히 특별직이자 최고상위직이다.
그래도 왕의 신하이고 이는 의전상 왕비보다 먼저, 그것도 세로로 쓰여진 명문의 구조상 윗부분에 나와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떤 대각간이고 왕비이기에 아래 위가 바뀌어 있는 것일까?
이는 적어도 이 두 사람이 뒤바뀐 순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만한 관계 혹은 뒤바뀐 순서를 원하는 관계는 아니었을까?
위홍 대각간과 진성여왕이 거론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신라는 초창기 성씨들이 번갈아가며 왕권을 계승하다가 불교를 공인하는 시기에 김씨 세습체체로 자리를 잡아 나간다.
김씨들을 석가족의 후손인 진골로 칭하고 6두품제인 계급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친족들끼리인 진골 사이의 결혼을 장려하고 전륜성왕을 칭하는 법흥왕, 진흥왕 등의 이름들을 쓰면서 왕은 곧 전륜성왕이시며 전륜성왕은 현세의 부처님이라는 왕즉불 사상을 고양시키며 골품제를 제도화해 나간다. 이때의 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이 주로 신앙되어진다.
신라 중기의 통일과업을 이루려는 시대에는 보다 강력하고 새로운 시대에 대안을 갖춘 미륵불 시대가 도래한다.
용화향도라고 일컬어지던 화랑도와 아직은 성년이 되지 않아 수염이 없이 표현된 미륵부처님 상호에 걸맞은 여왕의 시대가 이때이다. 미륵반가사유상들의 시대이다.
통일의 과업이 완수된 후에는 각점령지의 민심수습과 중앙집권을 위한 화엄사상이 부각되었다. 변방에 산재해 있던 각 요충지에 화엄십찰로 대표되는 곳에 서라벌 출신의 스님들이 산적(부석사), 구룡(해인사) 등으로 일컬어진 지방의 반발세력들을 쫓아내고 절들을 창건하는 설화들이 회자되는 것이 이 시기이다.
진성여왕과 위홍의 시대인 신라말기는 진골의 몰락으로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어 성골들의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시기이다.
진성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은 선덕여왕과 같은 강력한 왕권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름도 선덕여왕의 민旻으로 짓고 일찌감치 김춘추와 같은 정치후견인으로 동생인 위홍의 처를 유모로 인연을 맺어준다. 경문왕은 왕위를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고 위홍은 자신의 정치력을 펼칠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위홍과 진성여왕의 관계는 김유신이 김춘추와 문희의 딸인 조카와 결혼하는 것처럼 고려시대까지 공공연히 이루어지던 정치적 보험으로 관례였다.
이 두 사람은 여왕의 즉위 초기에, 나라의 권위를 세우고 민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1년간 조세를 감면하고 죄인들을 사면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위홍은 나라의 권위를 세웠던 황룡사9층탑을 보수하고 민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던 문화 지식인이었지 김춘추 같은 능수능란한 정치가도 김유신 같은 용병술이 뛰어난 군인도 아니었다.
위홍의 죽음으로 정치적 기반은 좁아지고 사랑하는 사람도 잃은 후에 여왕은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정사를 뒤로 하고 해인사에 원당을 짓고 살았다 한다.
위홍을 혜성대왕으로 추존한다
이런 관계라면 대각간이 왕비보다 위에 거명된 것이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 부처님의 조성연대가 여왕의 즉위보다 빠르므로 등신燈身을 왕이 되는 때로 보고 사미는 선정을 베풀어 은혜가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서원이었을 것이다.
이런 해인사였기에 위홍이 죽자 북궁으로 삼지 않았을까? 함께 불국토를 이루자던 원불이 모셔져 두시주자는 이미 안 계시지만 그들의 서원대로 온 세계가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가득 차길 바라는 마음은 오늘날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유명한 백거이의 장한가라는 한대목이다.

칠월칠일장생전七月七日長生殿
야반무인사어시夜半無人私語時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천장지구유시진天長地久有時盡
차한면면무절기此恨綿綿無絶期
7월 7일 장생전에서
깊은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했네.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어도
이 한 끝없이 계속되네.

비익조는 각각 날개가 한쪽씩이라 둘이 껴안아야 날 수 있는 새이고, 연리지는 뿌리는 둘이나 둥지가 서로 꼬여 하나의 기둥을 이룬 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