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에 갈 때마다 대개 하루 이틀 묵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리 집 행사로 가장 큰 것이 온 가족이 섣달 그믐날 절에 가서 그 이튿날 아침 뒷산에 오르는 일이었다. 물론 가야산 정상에도 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인사에 자주 들렀었는데 갈 때마다 홍제암에서 묵었다. 항상 대적광전 안을 힐끔 보고는 곧바로 장경판전藏經板殿으로 오르곤 했다. 수다라장修多羅藏에는 늘 사람이 붐볐으나 법보전法寶殿은 한산했다.
일찍이 우리 나라 비로자나불에 관한 논문을 썼던 나는 이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을 흥미있게 바라보곤 했다. 사방이 판전인데 그 가장 중요한 공간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것은 훌륭한 착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상 건듯 지나치고 말았고, 그 불상이 통일신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신라시대에는 목불이 없었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 실체를 보지 못한 것이리라.
팔만대장경은 진리의 말을 목판으로 새긴 것이니 바로 비로자나다. 비로자나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절대적 진리이며 그 진리는 햇빛처럼 온 누리에 퍼진다. 더 나아가 삼라만상이 곧 비로자나가 된다. ‘나’라는 개체도 비로자나이다. 비로자나란, 흔히 쓰는 말로 바꾸면 우주에 충만한 대생명력이다. 그 대생명력의 화신化身들이 삼라만상이다. ‘나’도 비로자나의 화신이다.
그러니 비로자나라는 여래상은 원래 만들 수도 없고 만들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생은 형상에 마음이 기우므로, 결국 중생의 소망대로 비로자나여래가 만들어진다. 그런 여러 가지 말못할 사정이 있어서인지 수많은 여래들 가운데 가장 늦게 조성된 것이 비로자나여래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밀교가 융성하여 보살형 비로자나가 다수 만들어졌는데 한국은 거의 모두가 여래형 비로자나다. 일본의 연구 성과에 의지해 온 우리 학자들은 이 여래형 비로자나를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밀교의 입장에서 보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편 신라시대에 비로자나를 잘못 이해하여 여래형을 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8~9세기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새로운 양식의 불상을 활발하게 만들어 내고 있을 즈음, 우리 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어서 때때로 열등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은 보살형 비로자나가 성행하는데 비해 유독 우리 나라만이 여래형을 취하고 또 선종 사찰의 주불主佛로 삼았었으니 동아東亞의 대세에서는 분명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비로자나불에 관한 연구는 소홀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늦깎이 학생이 되어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1985년에 나는 충격적인 논문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부산시립박물관장이셨던 박경원 선생님은 오랜 추적 끝에 776년에 만들었다는 비로자나불의 명문이 새겨진 시립박물관 소장품 납석제 항아리의 원 자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 원 자리는 바로 지리산 천왕봉 근처 석남사石南寺터에서 지금 사천 내원사內院寺에 옮겨온 석조비로자나불의 대좌 속이었다. 즉 대좌의 중대석 가운데를 항아리가 들어갈 만치 깎아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석조 비로자나불은 776년에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지권인智拳印을 맺은 비로자나불은 현재로서는 가장 오래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밀교의 비로자나불이 9세기 중엽이 돼서야 조성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우리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은 밀교와 관계없고 화엄경에 바탕을 둔 신라 독자의 도상을 창안한 것이라 확신했다. 화엄사상과 선종은 정치적으로는 그 후원자들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종교사상적으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화엄경을 바탕으로 성립된, 석남사石南寺의 석조 비로자나불이 조성된지 약 100년가량 지난 후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진 선문禪門의 주불主佛로 봉안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지방양식의 석조나 철조의 불상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른바 고전양식에서 크게 벗어나 예술작품으로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을 즈음에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지난 7월 4일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상이 현재로선 가장 오래 된 통일신라의 목불木佛이었음을, 그 불상 내부의 묵서墨書로 확인하게 되었다. 중화삼년中和三年이란 묵서가 선명하였다. 내부는 자귀 자욱이 생생하여 바로 어제 만든 것 같았다. 그동안 우리 나라에는 왜 목불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지지 않았나 항상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그것을 갈망했던 것은 단단한 화강암으로는 사실적인 양식을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든 경우는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한데 비해, 석불은 단단한 화강암이어서 가능한 한 단순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신성神性을 표현하려면 예배대상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미세하고 정교한 조각은 목불에서 가능했기에 마음 다른 한켠에서는 목불의 출현을 갈망해 왔다. 그런데 그 갈망이 현실로 되었다.
법보전의 불상을 가까이에서 보면 얼굴이 신체에 비하여 크다. 그런데 불단 위에 놓고 멀리서 보면 오히려 얼굴이 작아 보인다. 얼굴은 풍만하고 편단우견으로 드러낸 오른쪽 어깨와 팔은 비대할 정도로 살이 쪘다. 옷주름은 자연스러운 상태 그대로 조각했다. 특히 뒷면은 매우 두텁게 층단을 짓게 하여 인상적이었다. 자. 나무로 만드니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이렇게 얼굴이 크고 상체가 비대한 양식을 보니 경주 남산 약수계에 있는 석조 항마촉지인 석가여래 좌상이 언뜻 떠올랐다. 그 불상 대좌는 사각형이니 고려시대에 흔히 만들었던 사각형 대좌와 연결되어 있다. 그만큼 시대가 늦어 9세기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은 양식면에서 살펴볼 때, 만일 묵서가 없었더라면, 8세기 말 ~ 9세기 초의 것으로 편년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묵서로 883년에 제작된 것이 분명하게 되었으니 한편 사실주의적 표현이 9세기 말까지 가능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목불과 석불을 함께 견주면 안 된다. 재질에 의해 미술 양식이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수다라장과 텅 빈 법보전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대적광전 안을 힐끗 훔쳐보는데, 바로 똑같은 양식의 불상이 중앙의 커다란 비로자나불 옆에 앉아 있지 않은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후 나 홀로 다시 가서 두 상을 비교해 보니 크기는 거의 같았으며 옷주름 표현이 서너 군데 약간씩 다를 뿐이었다. 왜 이처럼 쌍둥이 같은 비로자나불을 만들었을까.
이들 비로자나불 두 구는 묵서가 암시한 대로 분명히 그 당시 대각간大角干 위홍魏弘과 진성여왕眞聖女王과의 관계와 얽혀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 섣불리 단정을 내릴 때는 아니다. 해인사는 의상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하나이고, 그런 연고로 목조비로자나불이 한 쌍이나 봉안되었고, 또 그런 연고로 고려대장경 목판이 이곳에 있으니 무엇인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조금씩 드러날 것도 같다.
천년 만에 제 모습을 드러낸 목조 비로자나불상 한 쌍의 출현은, 요즈음 이 혼탁한 세태에 쌍무지개처럼 신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