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마당에 풀이 자욱하다. 텃밭이며 꽃밭 할 것 없이 이제 막 싹을 틔우며 발돋움을 하기 시작한 어린 차나무들 주변에도 풀들이 우거져 무성하다. 한번 김매기를 해주었는데도 어느새 저렇게 훌쩍 커버렸구나.
장마철에는 풀을 베고 뒤 돌아서기가 무섭게 우북우북 불쑥불쑥 솟아나고 자라나서 그 자라는 소리까지도 들리지 않는다던가. 그야말로 일신우일신이 다름 아니다. 언제 곧 한바탕 낫과 호미를 들고 드잡이 질을 해야겠어.
햇빛이 나지는 않지만 모처럼 날이 갰다. 쨍하고 해가 내리쬐는 것보다는 좋겠지. 비 때문에, 다른 일거리 때문에 미뤄왔던 풀이나 슬슬 뽑아볼까. 호미를 들고 꽃밭과 부추밭, 고추밭, 마당에 있는 풀을 뽑는데 사흘이 걸렸다.
한 사흘이 걸렸으니 큰 농사를 짓는다거나 마당이나 꽃밭이 꽤 너른 곳에 사는가 보다 그렇게 여기는 이들이 있을 지 모르겠다. 아니다. 내가 숫자개념이 부족해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텃밭이라고 해보아야 고작 한 열 평쯤일까.
앞마당의 풀을 뽑는데만 사실이지 사흘이 다 걸린 셈이고 텃밭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일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쉬엄쉬엄 몸을 움직이는 운동이라 여기고 있지만 십 여분이 채 되지 않아서 온 몸에 땀이 줄줄 비 오듯 쏟아지고는 했다.
밑줄기들이 넓게 퍼져 있는 강아지풀을 뽑을 때였다. 풀뿌리가 뽑혀지며 드러난 흰쌀밥 같은 한 무더기, 개미집을 부순 것이다. 개미 알들이었다. 이게 웬 날벼락이냐 그랬을 것이다. 작은 개미들이 그 알들을 물고 허둥지둥 난리가 아니다. 미안하거나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도 전에 순간 내 입에서는 먼저 생트집이 나왔다.
“에이- 야 하필이면 여기에다 집을 지었냐.”
봉숭아와 채송화가 심어져 있는 꽃밭이었다. 도리가 없다.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저질러졌는걸. 풀잎 몇 장 그 위에 덮어주며 얼른 눈을 돌렸다.
며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음주가무의 날을 보냈던 몸 속의 탁한 것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풀을 뽑아 한곳에 모아보니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집채만하다 하겠다. 뜰 앞이 다 훤하다. 산들거리며 바람이 불어올 것 같다.
“너도 시원하지.”
잎이며 줄기가 억센 풀들에 눌려 있던 싹이 돋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보이는 차나무와 겨우 두 뼘 남짓 자란 파초가 후아~ 하고 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켠다.
“미안해 처음 약속대로 잘 돌보지 못해서 말이야.”
파초는 올 봄 실상사 수월암에 계시는 연관 스님의 뜰 앞에서 새끼를 치고 나온 것을 잘 키워보겠다며 두 촉 얻어온 것이다.
장마 구름을 뚫고 햇빛이 반짝인다. 등이 뜨겁다. 마당 한편 수북이 쌓여 있는 풀들 금세 그 잎이 시들어간다. 얼마나 목이 마를 것인가. 누가 돌보지 않아도 저처럼 자라난 풀들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꽃을 피우거나 씨앗도 맺어보지 못하고 무참히도 뽑혀져서 죽어 가는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애써 위안해본다. 크게 보면 자연의 약육강식, 순환질서의 고리에 그리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뭔가 불편하다. 살아 있으니 생명 아니겠는가.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나무나 작은 개미 한 마리, 그간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한 것이라고 말은 청산유수처럼 내뱉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스스로 분별을 두어 이것은 꽃이 좋으니 키우고 저것은 귀한 것이니 소중히 여기면서 그렇지 못하다고 여기는 다른 것들은 이렇게 함부로 뽑아 내거나 베어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이었다. 새벽이 훤히 밝아오도록 밀린 원고를 쓰다 겨우 든 잠에서 눈을 뜬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좀더 잘까 하다 간밤의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밖에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람. 기별도 없이 찾아오다니 하고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두분 스님이었다. 한 분은 근처에 인연이 있어 가끔 왕래가 있었던 분이었고 다른 분은 생태환경문제로 인해 오랜 단식을 했던 분, 먼발치에서 한번 뵙기는 했지만 처음 오신 분이었다. 두 손을 모으며 맞이했으나 얼굴이 금세 바뀌지가 않았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찻물을 끓이며 처음 들었던 마음을 닦아낸다.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간디와 게바라에 대한 견해를 나누었다. 간디와 게바라의 상황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공포, 노여움과 욕망과 분노가 떠나지 않고 있다. 어찌 흉기를 들고 집으로 들어온 강도를 향해 간디가 되겠는가. 저항하지 않겠는가. 스님들은 떠나셨다.
다 버리고 비우며 살겠다고 이렇게 떠나와 있는데도 어느 것 하나 떠나지 못하고 비우지 못했구나. 헛산 것이야.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중생 같으니라고 나이 오십을 눈앞에 둔 이 꼴이라니. 팔만대장경의 설화에 나오는 주리반특가가 떠오른다. 그는 부처님이 그를 위해 이른
“내 먼지는 내가 털고 내게 묻은 때는 내가 깨끗이 한다.”
이 두 구절도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바보였다고 한다. 그런 그를 위해 부처님은 다른 수행자들의 신발을 부지런히 닦고 수행자들은 주리반특가를 위해 그가 신발을 닦을 때마다 앞서의 게송을 들려주라고 했는데 어느 날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 저 마당의 풀 또한 내 안에 쌓여 있는 먼지라 하자. 분별이라면, 아니란들 또 어떠리. 부지런히 뽑고 닦아내리라. 내가 몸이라는 이 집을 떠나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