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파면문혜破面問兮여 운문문언 선사께서 운문산에서 결제를 하고 있는 납자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건곤乾坤의 안과 우주宇宙 사이에 하나의 보배가 있는데 형상形相의 산山 속에 비밀리 간직했다.
그런데 등불을 들고서 불전 안으로 들어가며, 산문山門을 가지고 와서 등불 위에 두었구나.
이것이 어떠한 소식인지 알겠는가? 말해보라.”
운문 선사는 하늘과 땅 사이, 우주 사이에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어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 보배가 사람마다 모두 갖추어져 있고 낱낱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말조차 대중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비로움으로 다시 말씀하신 것이
‘등불을 들고 불전을 향하고, 산문山門을 가지고 와서 등불 위에 두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운문 선사는 17세에 출가하여 목주 진존숙을 참례하였고
뒤에 설봉의존 선사를 찾아가 그의 회상에서 수년간 정진을 한 후 설봉의 법을 잇게 됩니다.
선사는 처음에 진존숙에게 법을 물으러 갔다가 멱살을 잡힌 채 쫓겨났습니다.
그 와중에 급하게 세게 닫히는 문짝에 발이 끼이는 바람에 발목이 부러지는 위법망구爲法忘軀를 통하여
안목이 열린 후 다시 설봉의존 선사를 찾아갑니다.
그때 마침 설봉 선사는 법상 위에 앉아서 법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법문을 듣던 문언은
갑자기 대중 속에서 튀어나와 설봉 선사를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목 위에 삼백근의 쇠로 만든 형틀을 어째서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에 설봉 선사는 감탄하면서 말했습니다.
“공부의 경지가 거기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그 말을 듣고서 문언은 다시 손으로 자기의 눈을 비볐습니다.
이에 설봉은 문언이 보통 수좌가 아님을 알아차리고서 이튿날 법상에 올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남산에 독성이 강한 자라코 모양의 뱀인 별비사鼈鼻蛇가 있으니 모든 대중들은 나다닐 때 잘 살피거라.”
이 말을 듣고 있던 문언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쑥 내밀고는 또 일부러 흔들어 보였습니다.
이 이후로부터 선가禪家에선 그를 선지식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 뒤 제방諸方을 다니며 법을 묻다가 복주대안福州大安의 법을 이은
소주땅 영수지성靈樹知聖 스님의 회상에서 수좌가 된 후 선사가 입적하자 그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몇 년 뒤 운문산으로 처소를 옮기고 폐허된 절을 수리하여
광태선원光泰禪院이라고 이름하고서 강호의 납자들을 지도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널리 퍼지면서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들었고 회상은 언제나 수행열기가 가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들을 운문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운문일보雲門一寶’ 법문을 모인 회상의 대중들에게 설하셨던 것입니다.
영가 대사는 무명無明의 참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환화幻化의 공신空身이 바로 법신法身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범부의 마음 속에서 부처의 마음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산形山이란 사대오온四大五蘊을 말합니다.
사대오온 즉 우리의 몸속에 보배가 감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내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혹한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바깥에서 구하느라고 일생을 쉴 줄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양에 걸려 있는 범부이기 때문에 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무아無我라는 사실만 깨닫는다면 나의 얼굴이 어찌 부처의 얼굴과 다르겠습니까?
등불을 들고 불전으로 향한다는 말은 일상적인 알음알이로도 알 수 있으나
산문을 가지고 와서 등불 위에 둔다는 것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운문 선사께서 일시에 우리들의 시비분별 망상의식을 쳐부수어버리기 위한
방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화두타파 이외에는 알 길이 없는 바로 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뒤가 꽉 막힌 이 말을 전광석화같이 마지막에 붙여놓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운문 선사는 “그대가 이 경지와 같아지려거든 먼저 깨닫도록 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티끌처럼 많은 부처님이 우리의 발바닥 아래에 있게 될 것이고,
팔만대장경이 우리의 혀끝에서 놀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니 깨닫는 일보다도 더 좋은 일이 어찌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설두 선사는 ‘운문의 한 보배’에 대하여 이렇게 착어着語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사이에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는데 벽 위에 걸려 있다.
9년 면벽을 한 달마 대사의 정안正眼으로도 이를 보지 못하였다.
오늘날의 납승들이 보려고 한다면 등줄기를 바로 후려치겠다.”
운문 선사께서는 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고 그 속에 하나의 보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등불을 들고 불전에 들어가고,
산문을 가져와서그 등불 위에 올려 놓았다고 한 것에 대하여 어떠한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선사께서 대신 대답하였습니다.
“축물의이逐物意移로다. 경계에 따라 뜻이 옮겨 가느니라.”
경계에 따라 뜻을 자유자재로 옮겨 갈 수만 있다면 이는 수처작주隨處作主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스스로 참됨을 지킬 수 있으면서도 공부의지 또한 가득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체의 모든 시비분별을 일시에 쳐부수게 되어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납자들이 남아도는 생각을 거두어 들이는 것은 일체의 번뇌망상을 없애기 위한 까닭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공부인들은 본래자리로 돌아오고 난 뒤에서야
여기가 바로 나의 본래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백가지 풀잎 끝에서 전쟁을 멈추니 만리 푸른 하늘에 새 한 마리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날아오릅니다.
무사지無師智로 작위作爲없는 묘용妙用을 발휘하여
조건없는 자비로서 청하지 않는 훌륭한 벗이 되어
한 구절에 죽이기도 하고 한 구절에 살리기도 하는 것이 진정한 선지식이요
또 제대로 된 공부인이라 할 것입니다.
체로진상불구문자 體露眞常不拘文字하고
심성무염본자원성 心性無染本自圓成이니
단리망연즉여여불 但離妄緣卽如如佛이로다
진상이 통째로 드러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심성은 물듦이 없어 본래 뚜렷한 그대로이니
허망한 반연 여의기만 하면 바로 여여한 부처라네.□
불기2549(2005)년 여름안거 반살림 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