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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사리장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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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산책 - 최태선 1999년 02월 204호
지난 호에는 탑의 축조 과정에서 나타나는 장엄의식에 대해 살펴보았고, 이번 호에는 탑에 안치되는 사리장엄의 형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불탑신앙의 변화
사리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화장한 뒤 남은 유골을 일컫는다. 여기에 불사리는 석가의 사리를 뜻하고, 승사리는 스님의 사리를 일컫는다. 또한 불사리를 모신 곳은 불탑으로, 승사리를 모신 곳은 부도로 구별한다.
인도의 경우 불사리(진신사리)가 봉안된 탑이 곧 열반을 뜻하였고, 불상을 만들 수 없던 시기에는 이 진신사리를 경배의 대상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초기 불교에서 석가를 친견하고자 하는 열망이 높던 재가 신도들 사이에서는 불탑신앙이 강력하게 대두되었으나, 계율을 지키며 수행 활동을 하는 승단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초기 계율상 조상에 대한 금지가 그러하고 아미타경전 등 초기 경전에 불탑신앙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에서도 기인한다. 그러던 것이 재가 신도들의 열망과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여 조심스레 불탑신앙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 근거로 팔천송반야경을 들 수 있다. 곧, 팔천송에서는 불탑숭배보다 지혜의 완성을 일차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기존의 경전과는 달리 탑상에 대한 공양을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지혜의 완성을 공양하는 것, 곧 법신의 개념을 일차적으로 강조하면서도 상이나 유골에 대해 긍정적으로 해석하므로써 사리탑 건립의 교리적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곧, 수도자들인 승단의 규율과 일반 재가 신도들의 요구가 서로 보완되어 조화를 이루게 됨을 알 수 있다. 또한, 묘법연화경에서는 조탑이나 조상공양이 일반 재가지들에게는 정각의 결과를 얻는다고 설하고 있다. 곧, 반야경의 교리에서 한걸음 나아가 법화경에서는 조형언어로 불교와 진리를 구상화하려는 대중의 욕구를 수용하게 되는데 이를 학계에서는 불교 예술이 크게 성행하게 되는 요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불탑신앙이 시작하면서 불탑신앙도 초기의 진신사리 신앙에서 법(경전)사리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법화경 견보탑품에서는 진신사리보다 경전(법신사리)를 더 중요시하고 있고, 밀교적 성향의 불교가 성행하면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같이 조탑공양(법신사리)을 위한 구체적인 경전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상에서 불탑신앙은 초기에는 승단이 부정하였으나, 재가 신도들의 열망에 따라 사리신앙을 인정하고(반야경), 불탑신앙을 인정하면서부터는 진신사리신앙보다 법신사리 신앙이 더 강조되고(법화경), 밀교가 성행하면서는 다라니를 봉안한 탑을 공양하는 것만으로도 일체의 신앙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리장엄의 방법 및 형태
이러한 불탑신앙의 주 봉안물은 사리(진신사리와 법신사리)와, 이들을 봉안하는 용기容器로 대표된다.
인도에서 사리를 안치하는 방법은 6매의 판석으로 상자형의 석함을 짜서 마련하는데, 석함의 안에는 보리수, 향수병, 금불상 등을 함께 넣는 예도 많다. 이 석함의 안치 장소는 탑안에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나 그 위치는 일정하지 않고, 또한 하나의 탑에 하나의 사리장엄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사리장엄구를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사리를 안치하는 용기는 다중 용기를 사용한 경우가 많은데, 그 때에는-밖에서부터 석함, 동, 은, 금, 수정의 순으로 마련하는 예가 일반적이다.
중국에서는 탑을 세울 때 탑기표시塔基表示를 매우 중요시했다. 따라서 사리장치는 탑의 종류에 관계없이 탑기 중앙의 지하에 묻는 것이 일반적이다. 목탑은 지하에 심초석을 놓아 굴립주를 마련하는데 이 경우 사리장엄구는 심초석 바로 밑의 석함에 봉안한다. 다중용기는 석함, 철, 은, 금의 순서가 일반적이며, 사리를 직접 넣는 용기가 금제인 것이 인도나 한국의 경우와는 다른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리장엄구의 안치는 초기 목탑지-제석사지, 황룡사지 등-들에서는 탑 하부 심초석의 중앙을 파내어 석함을 마련한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중국의 형식과 유사하지만 중국이 심초석 아래에 사리장엄구를 안치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는 심초석의 상면을 파서 석함으로 사용한 것에서 그 차이가 있다. 이는 중국의 방법을 응용한 형태로 이해되며, 이러한 초기 목탑의 시리장엄구 안치 방법은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목탑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초기 삼국과는 달리 통일신라시대로 갈수록 목탑보다 석탑이나 전탑의 양식이 발달하였고, 이들 석탑이나 전탑은 목탑에 사용되는 심초석의 장치가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 석탑, 전탑의 사리장엄구 안치는 탑 안에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탑임에도 심초석에 석함을 마련한 임하사탑지와 같은 특수한 예도 있음-탑 안의 공간위치는 감은사의 경우처럼 제3탑신석상부에 마련된 경우와 불국사 석가탑의 예처럼 제2탑신석에 마련된 경우, 단양향산리 석탑처럼 제1탑신석과 제2, 3옥개석에 마련된 예 등, 일정한 원칙이 있던 것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리를 봉안하는 용기도 밖의 석함은 석탑의 탑신이나 옥개석 상부를 파서 만들었다. 다중 용기는 시대별로 차이가 있으나 사리를 직접 봉안하는 용기는 유리 또는 수정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금제용기에 사리를 봉안하는 것과는 달리 인도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 밖에 외함은 시대에 따라서 금제, 은제, 금동제 등 다양하게 사용되며, 통일신라의 할석제,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백자가시대에 따라 용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학계에 알려진 것 가운데 통일신라의 사리장엄구로는 감은사 석탑 출토품과, 송림사 전탑 출토품, 불국사 석가탑 출토품 등이 있다. 감은사의 것을 살펴보면 외함은 전각형(또는 상여형)으로 기단부에는 안상을 뚫고 보살 신장상을 배치하였다. 그 기단 위에는 난간을 두르고 각 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중심에는 수정제 사리병을 놓고 청동호형 용기로 사리병을 덮었다. 또한 송림사 전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 용기는 사리병을 유리완에 담고 그 위에 천개를 씌우고 화려한 영락으로 장식한 전각형식의 금동제함으로 장식되어 있다.
감은사와 송림사 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는 천개형식과 화려한 영락으로 장식한 전각형으로 외함이 구성된 것이냐 사리병이 보이도록 고안된 것들의 특징은 통일신라의 독창적이고 화려한 장엄의식으로 대표되기도 한다.
또 다른 한국 사리장엄의 특징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한 소탑의 조성이다. 곧, 99개 또는 77개의 소탑을 만들어 탑에 봉안하면 99억, 77억의 탑을 만든 것과 같다는 의식에서의 행위이다. 이러한 의식은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유행하였는데, 우리나라 석탑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는 장엄구어기도 허다. 이들 소탑의 하부는 중앙이 원형상으로 비어 있는데 이 공간에 다라니경을 말아 봉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소탑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된 것처럼 목제로 제작된 것과 해인사 길상탑에서 출토된 것처럼 토제로 제작된 것, 그리고 동화사나 양양 선림원지 출토품처럼 납석제로 제작된 것 등 다양하다. 이 가운데, 토제의 소탑이 가장 많이 확인되는데 이는 다른 재질의 소탑보다 동일한 제품을 틀로 찍어 만드는 방법으로 대량생산하기 쉬운 점 때문으로도 생각된다.
이상 탑의 사리장엄구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본 것처럼 불탑은 많은 불교적 사장과 뜻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미술적 측면에서도 시간상 공간상의 차이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지금까지는 탑에 대한 연구가 겉 모습만으로 시대와 공간의 분류만을 하였다는 지적이 많다. 비록 한국의 사리장엄구의 자료가 대부분 도굴된 자료이거나 전해지는 자료이고 정식으로 학술화 된 자료는 얼마 없지만 올바른 불탑신앙을 이해하려면 불탑신앙의 사상적 배경과 함께 이들 사리장엄구의 변화를 포함한 복합적인 연구들이 지속적으도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