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나만이 제일이다 싶을 만큼 행복했던 시간들
아홉 살에 절에 들어와 으레 승려가 된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마음을 가져본 적 없이 물 스며들 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절집 사람이 되었다. 쉰일곱이 된 지금 돌아봐도, 행자시절이나 강원시절만큼은 어느 한순간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되는 순간 없이 출가의 길을 걸었으니, 이 생에 수행자라는 자리보다 내게 잘 어울리는 것은 없을 듯 싶다.
나는 행자시절을 거의 10여 년 했다. 스님이셨던 삼촌 밑에서 6년, 석남사에서 4년을 보내면서 출가자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부산 기장에서 조금 더 가면 서생이라는 곳에 인성암이 있다. 그곳에 나의 친삼촌이 스님으로 계셨는데, ‘일주일만 할머니와 놀다가라’는 스님의 말씀에 절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집에선 나를 데리러 오지 않는 것이었다. 어른들끼리는 나를 출가시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쓰지 않고 자연스레 절집에서 지내며 살았던 걸 보면 분명 나는 전생에도 출가자였을 것이다.
삼촌스님은 어린 조카인 나를 한 점 빈틈없이 규칙적으로 잘 키우셨다. 그 시절의 일상을 돌아보면 삼촌스님이 나를 올곧은 출가자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셨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새벽 세 시면 일어나 아침 예불에 참석했고, 6시까지 붓글씨 연습, 그리고 잠깐 운동을 한 다음 아침 공양을 했다. 그런 다음 도량 청소를 하고 두 시간 공부 시간에 들어갔는데, 그때 배운 것이 《초발심자경문》·《동몽선습》·《명심보감》 등이었다. 점심공양 후엔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씩 하면서 울력을 했다. 그리곤 저녁 공양을 하고 나서 예불까지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그 시간은 주로 스님에게 옛 스님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대여섯 명의 행자들을 앉혀놓고 평생 수좌로 사셨던 스님은 신심 돋우는 말씀으로 우리를 열중하게 했다.
“한 스님이 산에 갔다가 도깨비에 잡혔더란다. 해서 도깨비가 스님을 업고 가는데,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하면 도깨비가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또 관세음보살을 따라서 했더란다. 아무리 해도 도깨비가 스님을 놓아주지 않자 그 스님이 화두를 터억 들었더니, 도깨비가 ‘아이고, 중이 왜 이렇게 무거워, 왜 이렇게 무거워’ 하더니 스님을 땅에 내려놓고 갔더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런 말씀들을 들으면서 저녁 공양 시간을 맞았고, 저녁 예불 끝에는 108 대참회를 겸해서 300배를 하고 난 다음 자기 전까지는 참선시간을 가졌다. 당시 스님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공부 규칙표’라고 이름을 붙인 노트를 지금도 지니고 있는데, 가끔 꺼내놓고 보면 스님께서 친필로 직접 써주신 글들이 보인다. 《천수경》 등 외워야 할 염불문도 있고, 편지 봉투 쓰는 법에서부터 운동하는 순서까지 꼼꼼히 적혀 있다. ‘쓸데없는 말과 생각과 일을 하지 말 것. 점잖고 총명한 사람이 되라’는 글들을 보고 있으면 오십여 년 전의 행복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스님은 우리 행자들이 울력을 하는 시간에도 염불과 함께 하도록 했다. 해서 부엌에서 일을 하면서도, 마당을 쓸면서도, 마루를 닦으면서도 관세음보살을 불러서 온 도량에 염불 소리가 가득하곤 했다.
열한 살에 능엄주를 외워서 만 3년 동안을 새벽 예불 도량석을 돌면서 능엄주를 했다. 그랬더니 삼촌스님과 도반이신 지금 범어사 조실이신 지유 스님께서 다니러오셨다가 보시곤, “너는 이 도량석을 한 공덕으로 평생 중노릇하는 데 장애가 없을 거다” 하셨던 기억이 난다.
인성암에서 삼 년을 지내다가 천성산 원효암으로 가서 다시 삼 년을 삼촌스님과 함께 살았는데, 그 시절 《초발심자경문》을 배울 때는 너무 신심이 나서 ‘하늘 아래 나만이 제일이다’ 싶을 만큼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온 도량을 다니면서 염불을 하고 경을 외우고 산에 가서 나물 뜯으며 보냈던 그 순수한 시절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어린 나이에도 회색 승복 입는 것이 왜 그리 좋던지 마을로 심부름을 갈 때면 구깃한 옷을 입고도 날 듯이 발걸음이 가벼웠었다. 쌀이 으깨어진 물이다 하여 숭늉도 일곱 번을 가라앉혀서 먹을 만큼 철저한 교육을 받았던 그 시절은 평생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데 기틀이 잡혔던 세월이었다.
석남사로 가다
비구이신 삼촌 밑에서 있었으니 모두 남자들뿐이어서 할머니가 오셔서 돌봐주셨는데, 열다섯 살이 되자 삼촌스님이 ‘비구니 처소로서 아주 모범적인 석남사가 있으니 그리로 갈래, 아니면 조그마한 암자로 가서 편히 있을래’ 하고 물으셨다. 그동안 부쩍 자라서 소녀티가 물씬했으니 떠나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물론 나는 규율이 엄격하기로 이름난 석남사를 택했다.
내가 석남사로 갔던 60년대 초반은 인홍 스님께서 ‘가지산 호랑이’ 소리를 들으시며 성철 큰스님의 서슬 퍼런 수행자로서의 기상과 사상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한편으론 대웅전 보수 등 도량 불사가 한창일 때였다. 해서 석남사에서의 행자시절은 아침에 별을 보고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힘든 행자시절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때 진정한 수행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출가의 초입에 있는 행자시절은 ‘정말 이 사람이 출가를 해서 인천의 사표가 될 수 있는 인격과 자질을 가지고 있나’를 보는 기간이다. 배불리 먹고 등 따습게 하기 위해서 승려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인천의 사표가 되어서 불법을 홍포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승려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승려를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하늘사람도 숭배할 수 있는 자질을 가졌는가’를 보는 시간들이 행자시절이므로, 행자시절에 세속에서 묻혀온 온갖 번뇌와 아상을 떨치고 하심하지 못하면 온전히 출가의 길을 걷기가 어렵다.
당시 석남사에서는 불사가 한창이었으므로 행자뿐만 아니라 대중스님들도 울력이 많았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만 없이 열심히 살았다. 일에 묻혀 있었어도 기상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수행자로서의 긍지가 오롯했던 시절이었다. 대중스님들은 서로 ‘내가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해서 다른 사람들의 힘을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밤이면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대중이 잠들면 살며시 일어나 밤새도록 일을 해놓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일이 다 되어 있곤 하던 일이 많았다. 아침에 대중스님들이 일어날 때쯤이면 들어와 누웠다가 함께 일어났으니 누가 했는지 아무도 몰랐을 만큼 그렇게 하심으로 철저히 수행하시던 스님들을 보면서 나는 행자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렇듯 철저히 생활을 했어도 어쩌다가 조금이라도 대중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라도 있으면 인홍 노스님의 몽둥이가 날아오곤 했다.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는 날이면 행자든 노스님이든 관계없이 인홍 노스님께서 몽둥이를 들고 나오셨으니, 그럴 때면 온 대중이 이리저리 숨느라 야단이었던 생각이 난다.
석남사에서 보낸 행자시절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열여섯 살에 《치문》을 배울 때의 일이다. 새벽예불이 끝나면 대중스님들은 선원에서 참선을 하고 우리 행자들은 강당방에서 공부를 했다. 하루는 선원에서 들리는 죽비소리를 들으면서 잠시 졸았는데, 그만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만 화장실에 다녀오시던 인홍 노스님이 문을 열고 강당방에 들어오셨던 것이다. 그렇게 엄하신 분에게 졸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으니 다음 상황이 어떠했겠는가.□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