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百丈 懷海:749~814) 스님이 어느 날 마조도일(馬祖 道一:709~788) 스님을 모시고 가는 길에 날아가는 들오리떼를 보았다. 이것을 보고 마조 스님께서 물으셨다. 오늘도 내가 앉은 이 자리에서 해 뜨고 달이 뜨는 배경은 시시각각 달리한다. 어제는 이제 가려고 하는 봄을 모란 꽃잎 하나에 주저없이 보냈으니 곧 그 자리를 여름이 채울 것이다. 계절은 가는 대로 필시 다시 올 일이겠으나 우리는 그대로 앉은 그 자리에서 배경만 바꿀 뿐인가.
석도石濤(1642~1718)가 양주楊洲에서 보낸 어느 봄날도 이와 같았다.
작약과 앵두 모두 대지로 돌아가고 芍藥櫻桃俱歸地
귀 밑 백발에 참선이니 모두 잊어버렸네. 絲禪榻兩忘機
그대를 의지하여 이 법계法界를 빌려볼까. 憑君借取法界地
한번 씻어내리니 인간 만사 다 그르다. 一洗人間萬事非
양주는 계절과 자연이 빼어난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만큼이나 빼어난 시인과 묵객墨客이 사랑하던 고장이다. 나라를 잃은 설움과 함께 중생사를 고민했던 석도가 마지막으로 자리잡았던 곳이 양주이니 도연명이 돌아가 한 손에 국화를 들고 소나무를 어루만진 곳도 그곳이다.
돌아가 진짜 고향을 앞두고 있던 그가 양주에 찾아온 봄을 보내는 감상으로 오랫동안 참선을 의지하던 의자도, 진리를 구하던 도구인 그 몸도 모두 잊을 만큼 아쉬웠을까. 그리하여 봄을 보내며 친구에게 보여주었다던 이 시와 그림은 하염없는 안개와 불어난 개울 주변에 수양버들만 무심하다. 화가가 화가의 본분을 잊을 만큼의 아쉬움이었을까. 개울이 내려다 뵈는 작은 정자에는 가는 봄날이 아쉬워 말없이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있으니 아마도 석도는 눈 앞에 꽃들이 제 갈 길로 돌아가던 그 시절을 그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도 담담하고 심심한 그림이 되었을까. 자신의 마음을 시구에 담아 오로지 운율에 싣고자 하였으니 여기서도 화가는 안목眼目의 즐거움을 벗어나 버린다.
석도는 명明과 청淸의 명암이 오가던 시기의 화가이다. 황실의 왕자로 태어난 그는 명 황실이 망하자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불문佛門에 들어 스님이 되었으니 석도라는 이름도 그의 법명이다. 나라와 가족을 잃은 슬픔을 불법佛法으로 극복하고 사방으로 그 몸을 의탁하였다. 불문에 몸을 담았으나 걸출의 그림과 시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러나 그는 그림과 시와 같은 감각으로 세상을 읽어내지는 않았으니 그의 그림에서 선미禪味를 느끼는 것은 오랜 수행과 뛰어난 혜안으로 이루어진 그의 사상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제각기 앞을 다투고, 때를 다투던 백백만화百百萬華는 제가 온 곳으로 돌아갔으니 백장 스님이 보았던 들오리떼가 가는 곳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나 그들은 필시 태양이 오는 대로 다시 올 것이겠으나 중생이 부처를 이루는 곳은 그곳 그대로 집이고 고향이다.
봄의 들판이 생명으로 넘쳐나듯 시장市場은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모두 그냥 나온 사람 하나 없이 장에 물건을 사러 나온다. 어떤 이는 충분한 밑천을 가지고 나와 콩나물 1000원 어치도 겨우 골라가는 판이지만 어떤 이는 밑돈 하나 없이 나와 그 돈을 벌어 많은 물건을 사 가지고 돌아가고, 그래도 그 둘의 차이는 백지 한 장이 아니었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넘쳐나는 볼 거리와 입고, 먹을 거리에 취해서 온 곳도 갈 곳도 잊고 만다. 이것이 중생의 위태한 마음이다.
들오리떼도 제 온 곳과 갈 곳을 알고, 그곳에서 할 일을 안다. 모란의 향기가 꽃잎으로 떨어져 대지로 돌아갈 때에는 향기로서 할 일과 낙화落花로서의 본분이 분명하리라. 석도는 그림과 글로 방편을 삼았으나 그 덧없음을 봄과 함께 알았고, 백장 스님은 돌아가는 오리떼로 몸소 가르치셨다.
다음날 마조 스님의 설법자리에서 백장 스님이 이내 자신의 자리를 말아버리니 “어제 스님께 코를 비틀려 아파서 그랬습니다” 하였다. “그대는 어제 어느 곳에 마음을 두었느냐” 물으니 백장 스님은 “ 코가 오늘은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대답하였다. 코를 비틀어 가르쳐주시는 스승이 계셨던 백장 스님이 부럽기 한량없다. 내 코를 내가 비틀어 될 일이던가.□
선재동자 구도의 길 ①문수사리-인생 전기의 만남
선안주라고 하는 정사에 살고 있던 문수사리보살은 보살에 귀의하여, 혹은 보살을 수호하려고 주위를 떠나지 않은 권속들을 동반하여 세존의 설법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세존의 주위를 여러 번 돌아 예를 다한 후 세존의 곁을 떠나 남방으로 향하였다. 여러 지방으로의 유행을 위해서다. 이때 문수사리가 보살의 장엄한 신통을 갖추고 제다 숲을 떠나 남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본 장로長老 사리불은 자신도 함께 유행에 나서고 싶다고 생각하여 세존에게 작별을 고하고 문수사리를 뒤따랐다. 사리불에게는 같은 정사에 살며 수행하고 있는 6000명의 비구들이 급히 뒤따랐다.
사리불은 길을 가다가 모든 비구를 돌아보며 “보라, 문수사리의 신체의 맑음을, 그 광륜의 밝음을. 그것은 한없는 중생에게 기쁨을 주며 한없는 중생의 고통을 잠재운다. 보라, 문수사리가 나아가는 장엄한 모습을, 수행하는자들의 탁월함을. 보라, 장엄함은 길의 양쪽에서 넘쳐나오고, 전체에 넘치며 과거의 선근善根의 과보果報로서 세간의 왕들이 한없이 공양하고 문수사리께 예배하는 것을……”이라고 문수사리의 끝없는 공덕을 찬탄하였다.
그것을 들은 비구들은 마음이 깨끗해지며 환희가 넘치는 것을 느끼며 문수보살 뵙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스승인 사리불이 비구들을 대신하여 문수사리에게 고하니 보살은 돌아보며 비구들에게 “비구들아, 10종의 끊임없는 마음을 일으켜 대승의 가르침을 향해 나아가는 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보살의 지위에 나아가서는 여래의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 10종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에게 예경하고 공양하는 것, 선근을 쌓으며 물러나지 않을 것, 법法을 탐구할 것, 보살의 바라밀을 실천할 것, 중생계를 교화할 것 등이다. 이들을 항시 마음에 두고 그 마음을 체득한다면 모든 선근에 다가서며 윤회전생의 바다에서 벗어나 성문聲聞이나 독각獨覺을 넘어 보살의 서원을 성취하여 보살의 지위 나아가 여래의 지위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라고 법의 진리를 설하였다.
그러자 비구들은 걸림없이 부처의 경계를 바로 볼 수 있는 맑은 눈의 삼매三昧를 얻었다. 비구들은 그 삼매의 힘으로 시방의 여러 세상에 존재하는 여래와 그 법회를, 여러 처지의 중생들을, 다양한 보석으로 만들어진 객전客殿을 볼 수 있었다. 부처님의 설법하는 목소리, 다양한 언어와 문자로 말해지는 소리의 바다를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중생들의 마음이나 근기, 원하고 바라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었다.
문수사리는 이리하여 이들 비구들을 무상無上의 바른 깨달음에 안주시키고 한층 걸음을 옮겨 여러 지방을 편력遍歷하며 남쪽 땅에 있는 다니야가라라는 큰 성에 도착하였다. 이 도성의 동쪽에는 장엄당사라라는 큰 숲이 있어, 여기에서 과거에 여러 부처님이 곧잘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는 하였으며 일찍이 세존도 보살행을 닦으신 적이 있었다. 문수사리 일행은 이 유서있는 숲 안쪽의 탑묘에 머무르게 되었다.
사실을 들은 다니야가라의 많은 사람들이 도성을 나와 문수사리의 곁으로 모였다. 그들은 마하프라주냐라고 하는 재가의 장자를 선두로 많은 선남선녀가 있었으며 문수사리의 곁에서 보살의 양 발에 정례頂禮하고 보살의 주위를 세 번 돌아 예를 다하고 자리하였다. 그때 스다나, 선재라는 이름의 동자가 다른 동자들에 둘러싸여 와서 역시 문수사리의 양 발에 정례하고 자리하였다. 또 스바도라, 선행이라는 동녀도 다른 동녀들에게 둘러싸여 와 역시 문수사리께 정례하고 자리하였다.
다니야가라의 많은 사람들이 자리한 것을 본 문수사리는 사람들의 청에 따라서 설법해줄 것을 받아들여 위대한 변설辯舌의 힘으로 이야기 하려 하였다. 그때 선재동자를 알아차렸다. 선재동자는 그 이름처럼 날 때부터 칠보의 상서로움으로 혜택받은 그 집에는 온갖 보석이 우박처럼 쏟아져 양친은 바라문의 점술사와 친지들과 상의하여 선재라고 이름지었던 것이다. 선재동자는 이미 많은 선근을 심어 선지식에 다가서는 것을 염원하며 행이 맑고 불법을 받아들일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다.
문수보살은 이런 선재동자를 보고 서둘러 맞아들여 그에게 설법하였다. 그 내용은 불법이 생기게 된 경위, 끊임없는 불타의 출현과 깨달음, 부처님 설법회의 청정함, 불타의 색신에 구비된 상호의 해맑음, 그 법신으로서의 완성, 그 빛 무리의 장엄, 그 평등성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문수사리로부터 직접 부처의 공덕과 그 위대함을 들은 선재동자는 무상의 깨달음에의 원願을 마음에 품으며 그 땅을 떠나려는 문수사리께 탄원하였다.
“애욕의 해자가 둘려 있고 만심의 성벽이 높이 세워진 성곽, 그것이 지금 미망과 무지의 어둠에 덮여탐욕과 증오로 불타고 있습니다. 그곳에 사는 마왕의 지배하에 있는 무지하고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 갈애라는 족쇠로 이어져 책략과 기만이라는 행위로 마음은 지쳐 의감疑感이나 망설임에 의해 맹목적으로 되어 사악한 길을 터벅터벅 걷습니다.
그들은 진정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에 괴로워하며 윤회전생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측은한 이 성안의 사람들.
어찌하면 고난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이 사람들의 걱정을 구할 수 있는 맑은 월륜月輪, 지혜의 광명을 발하는 일륜日輪, 부디 저를 위해 빛을 조금 비추어주소서.
번뇌의 어둠을 깨는 태양과 같으신 분.
몸에는 인내의 갑옷을 두르고 지智의 검을 손에 하며 마의 군대에 대적하시는…
부디 저를 지켜주소서. 부디 저에게 해탈의 문을 열어 깨달음의 수레를 주소서.
금강과 같은 인내를 차축車軸으로 삼고, 신심을 채찍 삼으며, 선정과 삼매를 방어의 그물 삼아, 공덕의 보물로 장식된 수레, 바퀴는 생사유전의 고초를 깨고 갖은 악과 이교異敎를 타도합니다.
지혜와 방편을 엮어 어떤 중생이든 교화하고 전진만 있고 물러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보현행으로 맑아지며 광대무변이며 중생의 귀의처로 안락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법法이라는 최고의 수레에 저를 태워주십시오.
사람에게 보시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며 사람을 위하는 일을 하며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을 거두는 4가지의 가르침은 중생의 마음의 양식.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집중되는 다라니의 진언은 마음의 지팡이, 이와 함께 맑은 지혜가 빛납니다.
당신께서는 이러한 지혜를 닦으셨습니다.
당신은 지혜의 눈으로 법왕의 자리에 올라 법法이라는 무상無上의 관을 쓰고 계십니다. 그러한 법의 왕성王城을 부디 저에게도 가르쳐주십시오.”
선재동자의 게송을 여기까지 듣고 문수사리는 천천히 동자를 보며 답하였다.
“기특하구나 선남자여. 그대는 이미 무상의 깨달음을 향해 발심하며 많은 선지식의 가르침을 구하고 있구나. 보살도의 성취에는 보살행을 자주 묻지 않으면 안 됨을 자각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것은 몸소 선지식들을 섬기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결코 나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수보살님 그럼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어떻게 보살행을 배워 익힐 것인가, 어떻게 보살행을 실천하고 제 것으로 할지를 말입니다.”
“그대는 많은 중생의 해탈을 위해 많은 수행을 서원하였다. 훌륭하다. 그대는 반드시 세상의 평안이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보살의 길이다. 그대는 중생을 위해 보현의 행을 닦아라. 그대는 시방세계의 끝없이 가득한 부처들을 만나 법法을 경청하며 잊지 말아야 한다. 부처의 깨달음에 안주하며 진리의 바다에 오입悟入하면 모든 진리를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대처럼 구도의 마음을 일으키는 자는 진정 얻기 힘들며, 그것을 위해 보살행을 계속해 구하는 자는 더욱 얻기 힘들다. 하지만 모든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굳게 결심하고 진정한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그 일에 나태해서는 아니 된다. 선지식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선지식의 방편에 의문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선남자여! 이곳으로부터 남쪽에 라마웨란타 혹은 승락勝樂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그곳의 묘봉산에 덕운德雲이라는 비구가 살고 있다. 그 비구에게 가서 청하거라.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행을 실천해야 하는지, 어떻게 보살행을 완성시켜야 할지를. 그 선지식은 그대에게 보현행을 교시해줄 것이다.”
선재동자는 문수사리의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살의 주위를 돌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이제는 다시 선지식을 대면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눈물을 흘리며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