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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승과 얽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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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건용 2005년 06월 280호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큰 도시에서만 살았다. 수많은 얽힘이 만드는 약속과 약속 사이를 바쁘게 왔다갔다했다. 그런 와중에도 잠깐씩 고독을 생각하고 자유를 기억하는 것은 내가 작곡가이기 때문이리라. 작곡하는 순간만은 약속이 끼어들 수 없다. 혼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작곡가는 때로 피신을 한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절을 즐겨 찾는다. 자연에 가장 가까우므로, 우리의 전통적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곳이므로, 얽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므로. 한때는 방학 때마다 일주일 가량 산사에 머무르곤 했다. 그곳에 가면 하루 종일 해를 쪼이기도 하고 장작을 패 불을 때기도 하고 긴 낮잠을 자기도 한다. 신문과 TV와 전화가 없고 혼자 있다보니 한 사나흘쯤 지나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절에 머무르다 보면 예불 소리를 듣는다. 불자가 아니라도 예불노래는 참 좋다. 나는 산에 어스름이 찾아올 때쯤 듣는 저녁예불을 좋아한다. 어딘가 슬프고 내 안을 들여다보게 하고 시간과 삶을 생각하게 하는 그 노래가 좋다. 특히 ‘지심귀명례’는 늘 그 여운이 내 마음 안에서 길다.
<동승童僧>이라는 연극을 처음 본 것은 10여 년 전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음이 짠한 내용이었다.
‘한 산사에 동승이 있다. 갓난아이 때 한 여인이 절에 맡기고 간 아이이다. 그는 아직도 어머니가 자기를 찾으러 오겠다고 한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있다. 마침 이 절에 일찍 남편을 보내고 이제 아들까지 잃은 한 미망인이 재를 올리러 찾아온다. 동승은 이 미망인이 좋아진다. 미망인도 이 아이에게 끌린다. 그래서 이 아이를 양자로 삼고 싶어하는데 동승을 지금까지 키워 온 스님은 필시 불륜의 소산일 것이 분명한 이 아이를 속세에 내보내 인연에 얽히게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한다.’
이렇게 해서 빚어지는 드라마는 초겨울 산사처럼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 애절하게 전개된다.
그 이후 한 동안 이 연극은 다시 내 관심에서 멀어졌었다. 그러다가 6, 7년 전에 이 연극을 수업 중에 다룰 기회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매우 아름다운 연극 작품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한 번 음악극으로 다루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항상 이런 작품 저런 작품을 쓸 약속에 얽혀 있다보니 다른 데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기회는 엉뚱하게 왔다. 내가 근무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총장직을 맡게 된 것이다. 물론 더 바빠졌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시간이 없어졌다. 내 하루의 시간과 일과 생각은 모두 총장의 스케줄로 채워졌다. 다른 약속들은 끊어야 했다. 작곡의 위촉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미 했던 작곡 약속도 취소했다.
일년쯤 지나자 ‘이 기회에 내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곡을 써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총장직이 사적인 삶을 빼앗아 가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다른 많은 얽힘에서 자유로워졌으니 어쩌면 문제는 단순해진 셈이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동승>이었다. 그것을 오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니 <동승>의 이야기는 단순히 자기의 생모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슬픈 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연의 얽힘에 관한 이야기였다.
‘동승은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자신의 핏줄을 향한 본능적인 동경인 만큼 맹목적이고 간절하다. 절을 찾아온 미망인도 인연을 그리워한다. 남편을 떠나보냈고 어린 아들마저 먼저 보내야 했던 그녀는 인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고통을 최고로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다시 동승을 보고는 마음이 끌려 양자의 인연을 맺으려 한다. 스님이 보기에 너무도 딱하다. 미망인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출신 자체가 악연인 동승과 새로운 인연을 맺으려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그래서 완강히 그 사이를 떼어 놓으려 한다.’
마치 일기를 쓰듯이 조금씩 <동승>을 썼다. 하루에 30분이 나면 30분, 세 시간이 나면 세시간 작업을 했다. 오래 걸렸지만 중단되지는 않았다. 일 년 하고도 서너 달이 더 걸려서 완성을 했다. 작년 11월에 초연을 했고 금년 8월에 다시 공연할 예정으로 있다. 산사에서 공연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기획이 거론되기도 한다.
오페라의 마지막은 눈 내리는 저녁예불 장면이다. ‘지심귀명례’의 노래가 법당에서 들려오는 가운데 어린 ‘동승’이 어머니를 찾아 절을 떠나면서 오페라의 막이 내린다. 세상 모든 헛된 것을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하는 마음과 희미해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핏줄의 연을 찾아 먼 길을 떠나는 마음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더 좋고 더 나쁜 것도 없다. 둘 다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얽힘으로부터 자유로우면 마음이 평화로워질 것을 안다. 그러나 사람은 얽혀 살고 있고 얽힘을 동경하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얽힘에 숨이 막히고 괴로우면 다시 그 얽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도망친다. 그렇게 해서 좀 벗어났다 싶으면 어느 새 다시 얽힘이 그리워지고…… 이렇게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하고 그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이 우리네들 삶이다. 바로 내 안에 있는 마음의 두 가지 모습이다. <동승>은 나의 마음을 그린 오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