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입산은 도를 닦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절에 들어간 발심 출가는 아니었다. 출가하기 전, 오히려 나는 불교도, 스님들도 싫어했다. 워낙 불심이 깊었던 부모님은 나의 은사이신 원명 스님을 평생 모시면서 공부를 지도받고, 또 은사스님이 신信하는 노스님 한 분도 모시면서, 집에서는 물론 기도, 참선공부를 했고, 안거 때만 되면 두 분이 함께 절로 들어가 결제를 할 만큼 신심이 대단한 분들이었다. 그러므로 할머니와 함께 하는 날이 많았던 나의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 시절은 외로울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를 빼앗긴 절이 싫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부모님이 안거를 나곤 했던 절로 출가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문경 원적사로 들어간 것인데, 이유는 단 하나,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아서였다. 우리 일곱 남매를 다 출가시키고 싶어했던 어머니의 소원을 내가 들어드려야겠다 생각하고 걸음한 입산이었다. 그랬으니 어머니와 나는 보통 인연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어머니는 혈육 이전에 스승과 같은 존재로, 내가 출가생활을 하면서 굽이굽이 어려울 때마다 일으켜 세워주었던 선지식이요 스승이셨던 것이다. 지금도 어머님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스님, 수행자로 살려면 이 한 세상 안 난 셈 쳐야 해요. 세상에 났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라도 승복을 벗으세요.”
부모님의 스승이자 나의 은사가 되신 원명 스님 밑에서 보낸 두 해 동안의 행자시절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콩을 심었다가 낭패를 당했던 일이다. 막 입산한 그 해 늦봄, 스님은 내 손에 콩 심는 그릇을 쥐어주시면서 ‘한 포기에 콩을 두 개씩만 넣어라’ 하셨다. 그런데 더운 날씨에 빨리 끝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여러 개씩 콩을 심어버리고 말았다. 아뿔사, 그런데 나중에 콩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네 개, 다섯 개씩 막 나오는 게 아닌가. 스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스님이 보시고는 호되게 나무라시는 것이었다.
“정직하지 못하구나. 네가 벌써 어른 속이는 것부터 배워가지고 무슨 중노릇을 하겠느냐. 돌아가거라.”
단호한 스님의 꾸중에 집으로 돌아가야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어머니는 집에 나타난 나를 데리고 절로 들어오더니 콩 순을 솎아서 반찬을 만들어 상에 올렸고, 나는 다시 스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승려생활 하고 싶으면 부처님 앞에 참회해라. 오늘부터 21일 동안 삼천배씩 하거라.”
은사스님을 속인 대가는 혹독한 것이었다. 절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밤새도록 울기도 했는데, 마지막 날엔 오기가 생겨서 스님 보라는 듯이 1만배를 했다. 그래서 또 꾸중을 듣고 말았다.
“이놈이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눈물로 참회를 하지 않고 오기로 했구나. 나는 네가 눈만 꿈뻑여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
그래서 그러셨는지, 나의 은사스님께선 일을 참, 많이도 시키셨다. 원적사 나무는 다 내가 해다가 톱질하고 도끼질을 했다. 그 시절 낫질하고 톱질하면서 상처도 많이 입으면서 고생을 했는데, 그래서였을까, 훗날 선방에서 지내면서 보니까 나만큼 낫질 잘하고 지게질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나 일을 했는지 운동화를 한 번 신으면 점심 공양 때도 끈을 풀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렇게 낮으론 일만 하다가 밤에 책을 좀 보려고 하면 스님께서 ‘왜 책을 보냐’면서 빼앗으시는 것이었다. 얼마나 야속했는지 그땐, ‘우리 스님은 정말 심성이 안 좋은 분이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은사스님의 공부 방법이 근원을 바로잡아 들어가는 방법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견正見이 서지 않은 어린 행자가 책을 본들 자기 알음알이로 분별심을 일으킬 것임이 분명했을 것이니 공부에 도움이 안 되리라 생각하신 것이다. 그리고 행자 하나가 일을 하면 얼마나 했겠는가. 일꾼을 사서 할 수도 있는 일을 내게 시킨 것은, 기운은 넘치고 생각은 복잡할 때인 젊은 시절, 잡념이 들지 않게 한 배려였던 것이다. 세속의 생각은 다 털어버리고 그냥 단조롭게 사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 낮엔 일을 고되게 시키고 밤엔 아무 잡념 없이 잠을 자게 만든 것이었다.
선방으로 가기까지 스님 곁에 오 년을 머물면서 그렇게 일만 했는데, 그것은 공부하고 싶어하도록 기운을 축적시켜주신 거였고, 내가 수좌로 살아갈 수 있는 틀을 만들어주신 거였다. 한평생을 선승으로 살아오신 분의 공부방법이었을 것이다.
나의 은사께선 이 년 동안의 행자생활을 마치고 나서 사미계를 주시고도 삼 년이 되도록 승려증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도를 닦으러 왔으니 도만 닦으면 되지, 승려증이 왜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스님 말씀을 들으면 이치에 맞는 것 같아, 계를 받고도 3년을 더 스님 곁에 머물면서 일을 한 것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에 나가 공부하고 싶은 생각과 함께 차츰 오래 붙잡아두고 있는 스님에게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럴 즈음 어머니가 스님에게 “오 년 동안 행자시절을 보냈으니 이제, 대중으로 보내서 공부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식으로 청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스님께선 승려증을 만들어주셨으니, 지금부터 30여 년 전이었다.
오 년을 곁에 두고도 스님은 더 붙들어두고 싶으셨는지, 걸망 하나 메고 ‘스님, 저 공부하러 갑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당신이 입던 장삼 한 벌을 주셨다. 키가 자그마하셔서 내가 입기에는 길이가 짧은 것이었다. 그리고 ‘승려증 만들어 달라’고 고집 피우고 선방으로 가는 상좌가 미우셨는지, 선방에서 쓸 발우 대신 중국집에서 음식을 담는 데 쓰는 흰 플라스틱 그릇을 사주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선방으로 가 공부한다는 생각에 신심이 나서 직행버스가 다니는 데도 타지 않고 걸어서 간 곳이 상주 도성암이었다. 원적사에서 도성암까지는 꽤 먼 거리를 즐겁게 걸어서 도성암에 도착해서 방부를 들이고 선방에 앉아 있으니 그 감회가 어떠했겠는가. 그때 도성암 입승스님이 지금 통도사 극락암 선원장인 명정 스님이셨는데, 공양시간에 내가 제일 하판에 앉아 바루를 펴고 앉아 있으니 가만히 쳐다보았다. 짧은 장삼에 플라스틱 흰 발우가 안돼 보였던지, 공양을 마치고 나자 발우를 하나 내주었다.
그렇게 선방에서 준 발우를 가지고 한 철을 나고 은사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서는 ‘산철에도 공부하려고 방부를 들이고 왔습니다’ 했더니, ‘잘 했구나’ 하시며 흔쾌하게 받아들이시는 거였다. 또 붙잡아두고 일을 시킬까봐 아예 산철에도 방부를 들이는 얕은 꾀를 냈던 것인데, 스님께서 왜 그걸 모르셨겠는가.
아마도 스님 곁에서의 오 년이라는 세월이 나로 하여금 강원도 가지 않고 선방 수좌의 외길로 걷게 했던, 그래서 그 길에서 정견을 세우고 뜨거운 발심을 하게 하는 수행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 곁에서 머물며 약초 심고, 나무 톱질하면서 세속사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행자시절 오 년은, 내 출가 수행자의 길에서 가장 순수한 시간들이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