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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사 서암 원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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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5년 05월 279호
생명이 움트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지리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벚꽃이 절정을 치닫고, 겨우내 메마른 나무에 물이 오르면서 죽은듯한 가지를 비집고 얼굴을 디미는 연둣빛 새순은 생명의 신비를 실감케 한다. 4월 중순이니 예년에 비하면 더딘 셈. 올해는 날씨가 유난히 변덕스럽다. 그래서 더욱 반가웁다.
함양에서 인월을 지나 마천 벽송사까지는 차로 40분 정도. 우리 나라 3대계곡 중의 하나라는 칠선계곡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으니 주변 풍광이야 무슨 말이 필요할까. 조선시대 벽계 정심 대사가 머물며 선을 가르쳤던 선찰로 그 선맥을 계승한 벽송 지엄 스님이 중창해 은거해 살던 기록이 전해진다. 신라양식의 석탑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벽송 스님 훨씬 이전에도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은 하고 있다.
벽송사는 오래 된 옛절이지만 남아 있는 유물은 많지 않다. 따라서 행운인지 불행인지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벽송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목장승. 과거 절입구에 세워져 절지킴이의 역할을 해왔으나 지금은 도량 안에 집을 짓고 모셔진 목장승은 그 풍부한 표정으로 민중미학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변강쇠가 이 장승을 장작으로 사용하다 동티나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벽송사가 명소로 부각되기 시작하고 있다. 한번 가볼 만한 곳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참배처로서뿐 아니라 지리산 관광 코스 가운데 하나가 돼가고 있다. 서암에 굴법당이 조성되면서이다.
벽송사를 향하다 보면 도량 못 미쳐 두 갈래 길이 나오고 왼쪽으로 난 길에 ‘서암’이라는 팻말이 나온다. 그 길따라 조금만 오르면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승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습이 펼쳐진다. 서암의 돌들은 그냥 돌덩이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불보살이 돼 있다. 특히 자연 암반에 극락세계를 구현해놓은 굴법당은 신비로움과 환희심을 불러온다. 어떤 이는 이를 석굴암에 비견하고 어떤 이는 아잔타 석굴 못지 않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서암에는 벽송사 큰스님 원응 스님이 거주하고 있다. 벽송사와 서암을 지금의 모습으로 일구어놓은 주인공이다. 벽송사에 계시다가 20년 전부터 서암으로 거쳐를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응 스님의 세수 일흔하나, 벽송사에 머물기 시작한 것이 서른 이전이었으니 절과의 인연이 보통 깊은 것이 아니다. 그동안 몇 차례 안거를 위해 절을 비운 것 이외에 절을 떠난 적이 없다. 폐허 위에 오늘의 벽송사가 되기까지 절 구석구석에 스님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다.
40여 년 전 처음 칠선계곡으로 접어들었을 때도 바로 이맘때였다. 부산 선암사에 있었는데, 난리 끝이라 부산은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지리산은 산자수명하고 수행자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책 속의 말만 믿고 걸망 메고 그저 정처없이 떠돌다 찾아든 곳이 벽송사였다. 말이 절이지 비도 피하기 어려운 판잣집이었다. 빨치산의 야전병원 자리였던 벽송사는 지리산의 대부분의 절들처럼, 산사람들의 은신처라 하여 불태워졌다. 실상사는 화를 면했지만 금대암도 대원사도 그때 소실되었다.
그래도 인연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때도 절 주변에 벚꽃이 만발했는데 뭔지 모르지만 고향에 온듯한 푸근함을 느꼈다고 한다.
텃밭에서 일군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예사였다. 사는 집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부처님 모셔진 법당에 비 새는 것은 막아야겠다 싶어 마을에서 기와를 간신히 구했는데, 옮겨오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절까지 길이 번듯하게 나 있지만 그전까지 벽송사는 오지 중 오지. 그래도 그때는 시골에 사람들이 있어 한번에 오는데 지금 돈으로 3천원 정도 주고 인부를 사서 져날랐다. 십리도 넘는 산길이었으니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서암은 수행하다 중간에 산보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장소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바위가 천지인 쓸모없는 땅이었지만 스님의 눈에는 그리도 좋아보였다. 상서로운 빛이 눈에 들어오면서 바로 성지다 싶었고, 앞으로는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처음에는 길도 없었다. 옳은 장비도 없던 시대로 삽으로 조금씩 흙을 파내가면서 길을 만들고 땅도 평평하게 골랐다. 10년 정도 지나 집을 하나 짓고 그 앞에 목련과 후박나무 등을 심었는데, 지금은 멋들어진 고목이 돼 있다.
20년 전 스님은 거처를 아예 서암으로 옮겼다. 그리고 지금까지 원응 스님은 서암을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다. 나무 하나 돌 하나에 스님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다. 서암은 원응 스님이 발견하고 만들어놓은 스님의 예술품이다.
현재의 굴법당 자리는 애초 흙더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어느 순간 그것을 파내보면 좋을 듯한 느낌에 삽으로 조심스레 파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늑한 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부러 만들라고 해도 힘들 것이다. 적당히 안을 고르고 다듬어 굴법당을 만들기 시작했다. 돌벽에 불보살을 새기기 시작했다.
스님은 극락세계를 굴 안에 조성코자 했다.
지리산은 민족의 분단과 함께 엄청난 수난과 시련을 겪은 산이다. 스님이 이 산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전쟁은 끝났지만 빨치산 잔군 소탕으로 총성이 채 멈추기 전이었다. 그러기에 무수한 원혼들이 허공을 방황하고 있음을 스님은 느끼고 있었다. 그들을 이고득락시키려면 성지를 만들고 그 공덕으로 원혼들의 해탈을 발원했다.
“아군 적군이라고는 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하면 형제간이라. 당시야 적이었지만 지금은 반성하고 있거든. 나중에는 미련한 행동이었다고 할지 모르지.”
들어오는 문을 대방광문大方廣門이라 한 것도 서로 싸워 죽이는 이기적이 생각이 아니라 마음을 넓혀 통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굴법당 위에 비로전을 둔 것도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기적인 작은 뜻이 아니라 큰 뜻을 이루려면 큰 집이 필요하니까.

그러나 자연석에 직접 조각해 들어가는 일은 석공들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두 사람이 손을 들었고 마지막 세 번째 맡은 이가 지금의 모습을 완성시켰다. 굴법당 안의 돌 가운데 1/3은 불가피하게 외부에서 가져와 붙여야 했다.
굴법당에는 부처님과 10대 제자 그리고 극락세계 8보살이 있다. 서암의 굴법당은 석굴암과 많이 비교되곤 하는데, 원응 스님은 자신이 석굴암 부처님을 보면서 나름대로 부족하다 싶은 점을 보완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주불 상호는 실상사 철불을 참고로 했고 복색은 석굴암 부처님과 같이 했다. 10대 제자도 각각의 특징을 살려가면서 우리의 전통 복색의 특징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석굴암의 10대 제자도 역시 조각을 해서 끼워넣은 것인데 반해 굴법당 안의 제자분들은 원석에 그대로 새겨넣은 것이라는 점을 스님은 강조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님이 보기에는 상호에 걸리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100%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 그 정도만으로도 환희롭다.
불사를 시작하면서 스님은 기도와 화엄경 사경을 시작했다.
“불사를 한다고 하지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라. 힘이 부족하면 불보살의 가피를 받는 거지. 인간의 두뇌는 한계가 있어. 따라서 제대로 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게 돼. 그럴 때는 불보살의 지혜를 빌려야지.”
10년에 걸쳐 화엄경 사경을 했다. 하나는 먹으로 하나는 금으로. 화엄경은 총 60여 만자, 책으로 묶으니 70권이 되었다. 스님은 얼마 전 부산, 대구, 서울 등에서 화엄경 금니사경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고려시대 이후 화엄경 사경은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상황인지라 보는 이들의 감탄이 컸다.
글씨는 함양 군청에서 만든 모든 곳의 글씨는 모두 스님이 쓴 것이라고 봐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정도로 알려져 있다.

봄꽃이 만발한 요즘 서암을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별다른 수입이 없는 절에서 그들이 놓고 가는 천원짜리 한 장이 절 운영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동안 서암의 규모는 많이 커졌다. 현재 요사채로 쓰는 건물 하나 달랑 있던 데서 굴법당이 생기고 비로전도 생겼으며, 설법당과 식당 등이 크게 들어섰다. 그러난 한결같이 돌과 돌 사이의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 굴법당은 물론이고, 요사 이외에는 마치 건물을 바위 사이로 쏙 끼워넣은 듯하다. 특히 스님이 거처하는 곳은 굴을 파고 들어앉은 모습이 마치 새집을 보는 듯 하다.
예부터 스님들은 돌과 인연이 있었다. 달마도 굴에 있었고, 중국에도 돈황이니, 아잔타니 해서 석굴 사원들이 많다. 스님도 굴 속에 사는 셈이다. 그러나 스님 방은 벽을 스티로폼과 베니어로 이중으로 막고 한지로 벽지를 발랐다. 돌의 찬 기운을 그대로 쏘이게 되면 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에만 있으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불기를 조금 넣어야 할 정도로 찬 기운이 있다. 선풍기도 에어콘도 필요없다.
서암에서 스님은 아직 할일이 남아 있다고 한다. 땅을 고른 지 40년 기거하면서 불사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진행중이다. 화엄경사경 전시실이 있어야겠다 싶고 위쪽으로 몇 군데 불사할 곳도 남아 있다. 그러나 스님은 일을 급하게 추진하는 법이 없다. 천천히 상황 되는 대로 무던하게 진행시켜 나간다. 참으로 무던한 성격이기에 불사를 함에도 무리가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멈출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수행. 애초 절에 들어올 때부터 선공부를 위해 들어온 것인데 지금도 스님은 부족감을 느낀다. 신문지상에서 누가 성취했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사실 여부를 떠나 아직도 가슴이 뭉클해진단다.
스님은 자신을 ‘둥근이 중의 둥근이’로 표현한다. 두루뭉실하다는 겸손의 말씀인데 무척 어울리는 표현이다 싶었다.
서암이 마주하고 있는 산을 보니 둥글고 풍성한 모습이 마치 연꽃 봉오리 같다. 스님이 저 앞산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동화해 간다더니 맞는 모양이다. 스님이 산을 닮은 것인지 산이 스님을 닮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