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앞니에 털이 나다(板齒生毛)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 김현정 2005년 05월 279호
꽃이 떨어지는데 봄, 가을을 가릴 것인가. 이때를 들어 허무하지 않을 수 있으랴마는 목련의 낙화는 우리네 심정을 뚝뚝 무너뜨린다. 땅에 떨어진 꽃잎도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야 마는 낙화落花의 허망함을 어디에 비하랴. 봄 길에 떨어진 꽃잎을 차마 곁눈질조차 못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추운 겨울 화롯가에 무너지는 눈발보다 더 허망한 것이 봄의 화려한 꽃잎이다. 백사장 모래가 오고가는 파도에 힘없이 쓸려내려가듯 잡아둘 수 없는 것이 세월이고, 봄바람에 잡아둘 수 없는 것이 사방팔방 흩어지는 꽃잎이다. 봄바람이 드세봐야 얼마나 드셀까, 그 살풋한 봄바람에도 제풀에 자지러지듯이 흩어져버리니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도를 가르치는데 봄의 찬란함만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봄아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오면 녹음방초綠陰芳草가 더 찬란하리라던 옛 노래의 짐짓어린 호기도 떨어진 꽃잎 앞에서는 아쉬워 봄이니 여름이니 구분하고 또 3월에 4월의 구별 얹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다.

어느 날 조주趙州(778~897) 스님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앞 이빨에 털이 났다.(板齒生毛)”
“…….”

선사의 앞 이빨에 털이 났으니 내가 나무 위에 꽃잎으로 피어났어도 옳을 일이다. 꽃잎 위에 신록이 더해져 피어나도, 또 그 꽃잎이 낼 저녁 동산 위에 달이 된들 그것을 두고 둘이라 할 것인가. 조주 스님의 일갈처럼 말이 아닌 가르침의 등불이 오늘까지 전해 내려와 2500년 후의 중생을 깨우치고 가르치니 석가여래의 탄생이 거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석가께서 이 땅과 마지막 인연을 맺으시고, 이를 인연으로 다시 조사께서 서쪽으로 그 뜻을 이어오셨으니 이빨과 터럭을 구별하여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진홍수陳洪綬(1589~1652)는 명대明代 말 활동하던 화가로 4대 괴걸怪傑의 하나로 뽑힌다. 괴걸이라고 하면 괴이하며 걸출한 화가를 말함인데, 그의 그림은 분명 공필工筆의 면모가 담겨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괴이한 허허로움이 있다. 그는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빼어나고 세밀한 필치와는 대조적으로 배경을 철저히 생략하는 그야말로 실실허허實實虛虛, 허허실실虛虛實實의 묘미를 담았다. 특히 가는 먹선과 붓질을 좋아하고 그 위에 채색을 담담히 즐겼던 모습은 일찍이 북송이나 원의 화가들에서나 볼 수 있는 고아한 아취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가는 붓질을 즐기기는 하나 그 세밀한 붓질에도 한 점 주저함이 없는 것이 그의 필선이다. 그의 붓질은 물이 흐르는 듯, 구름이 떠가는 듯하여 직선보다는 곡선을 즐겨하였고, 세밀한 필선이지만 장식과 군더더기는 배제하였다. 다만 필선 주변으로 나타나는 먹의 음영은 그것이 현실인지 꿈 속인지 구분을 어렵게 한다. 아마도 기괴함의 근원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만년의 작품집인 <복고도古圖>는 호방한 필법이 새로운 화풍으로 각광받던 그 시대 밤새 내린 가랑비같이 그 어지러움을 잔잔히 가라앉혔다. 채색없이 세세하게 표현한 연꽃은 뼈를 세우지 않은 몰골沒骨의 호방한 연꽃만 보아온 눈에는 더없이 조용하다. 어느 연밭에 괴석이야 있으랴마는 연꽃이 의지한 괴석도 이채롭고, 그 밑을 흐르는 물빛에서도 이 사바세계가 떠나 있다. 그렇다면 그 바위는 방금 수미산에서 옮겨온 것인가. 붓질 하나에도 공간을 옮기는 재주가 화가에게는 따로 있는 것 같다. 화면 속의 연꽃이 의지한 공간보다 더 많은 시야를 주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진홍수의 그림을 보면 그가 그려낸 화면보다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하니 공간을 확장하는 그의 탁월한 능력은 어떤 내공에서 비롯된 것일까 싶다.

연꽃은 룸비니 동산 아기부처님의 일곱 발자국마다에도 피어났으니, 꽃이 피고 지는 것은 필시 때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월 팔일을 당하여 석가부처님의 탄생을 즐거워하고 축복해 마지않으니, 이전 이천 오백 번이 넘는 봄날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그 연꽃이 피고 지기를 무수 무량이 아니었겠는가. 석가여래의 탄생하시던 그때를 경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때에 태자의 탄생에 감응하는 상서로운 서른네 가지의 현상이 나타났다. 시방의 세계가 모두 다 밝아졌고, 삼천대천세계가 열여덟 가지로 차례로 움직여 큰 언덕이 평탄해졌으며, 바짝 말랐던 나무에 다시 꽃이 피고, 나라와 나라의 경계에는 저절로 아름다운 나무가 생겼다. 동산에는 신비롭고 단 과일이 맺히고, 육지에서는 크기가 수레바퀴만한 보배 연꽃이 피어났다. 땅속에 묻힌 광이 저절로 튀어나오는가 하면, 모든 강에서 값진 보배가 큰 광명을 내뿜었으며, 여러 하늘에서 아름다운 옷이 저절로 내려왔다. 모든 시내의 흐르는 물은 고요하며 맑아지고, 바람이 그치고 구름이 없어지며 하늘이 밝고 깨끗해지더니 또 향기로운 바람이 사방으로부터 불어오면서 촉촉한 가랑비가 날아다니는 먼지를 가라앉혔다.’

그때, 4월 초파일의 룸비니가 오늘 이 봄날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또 무슨 조화 속인가. 어제 밤 내린 가는 봄비가 저 먼 서역의 고비사막 통째로 날아온 어수선한 황사먼지도 가라앉히고, 난분분 벚꽃잎만 날리니 이 봄바람에 또 어딘가 아기부처님이 칠보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봄바람을 의지하여 중생을 위한 원을 세웠건만 가볍디가벼운 중생의 봄바람 가는 비에도 오르고 내리기를 온 종일이다. 봄바람 흩어지는 꽃잎따라 내 마음도 흩어질까 단속하고 또 단속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