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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도 나도 울었던 그 날, 글을 못 배우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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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화산/대구보광사 조실 2005년 04월 278호
“이제 저는 금생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집에 돌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영겁의 무명 번뇌로부터 반야般若를 철저히 밝히고자 하오니 부모님은 애달파하지 마시고 저를 기꺼이 버리시되 싯달타를 떠나 보낸 정반왕淨飯王과 마야摩耶부인의 성덕聖德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후일 부처님 회상에서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고 금생은 이별하기로 하옵소서. 이것은 제가 부모를 받들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오라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생에 자기를 구제하지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 자기를 구제하랴’ 한 것입니다. 한없이 죄송하오나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이 자식을 다시는 생각하지 마옵소서.”

당나라 때의 고승인 동산양개 선사가 그의 어머님께 드린 편지다. 아들의 글을 읽은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편지로 답한다.

“아들은 어미를 버릴 뜻을 가졌지만 어미는 아들을 버릴 뜻이 없었다. 그리하여 네가 먼 곳으로 떠난 뒤에는 밤낮 슬픔에 잠겨 눈물만 뿌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괴롭고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너는 이미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맹세했으니 어떻게 너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느냐? 그러므로 나는 얼음 속에서 고기를 구해오거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나무로 어머니를 조각하여 봉양했다는 정란丁蘭과 같은 효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네가 목련 존자目連尊者 같은 성인이 되어 고해苦海에서 나를 구해 불과佛果에 오르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깊은 허물이 있게 될 것이니 부디 불법에 통달하기를 간절히 빈다.”

나의 은사이신 몽초 스님 앞에서 이 글을 배우다가 말고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스승 앞인 것도 잊은 채, 한참이나 어깨를 들썩이고 울었다. ‘다만 네가 목련 존자같은 성인이 되어 고해에서 나를 구해 불과에 오르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깊은 허물이 있게 될 것이니 부디 불법에 통달하기를 간절히 빈다’ 하는 글귀에선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열일곱 살의 어린 제자 하나 달랑 앉혀놓고 이 글을 새겨주시던 우리 스님도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울었던 그날은 일찌감치 글을 파하고 말았다. 지금부터 칠십여 년 전인 1930년대, 통도사에서 보낸 두 해 동안의 행자시절 중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추억이다.

어느 청년회에서 주최한 ‘석가여래 일대기’ 강연을 들은 것이 출가에의 인연을 트는 계기가 되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높은 자리에 앉아 월급도 많이 받고 대우도 받으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겼던 청소년시절,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한 석가의 일대기를 접하고는, ‘저기에 뭐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날로 공부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던, 부귀영화에의 꿈을 접고는 불교에의 동경으로 통도사를 찾은 것이 열일곱, 나라를 빼앗겨 어느 것 하나 자유로운 것이 없었던 일제시대 때였다.
통도사로 입산하니 명필에 오래 주지를 지냈던 구하 스님 등 노스님들이 십여 분쯤 계셨고, 당시 이미 선지식으로 알려져 있던 극락암 조실 경봉 스님을 비롯한 대중스님들이 삼백여 분이나 되었다. ‘선교양종 불찰대본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던 대단히 큰 사찰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귀공명을 버린 뜻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화두가 되어 있던 행자시절 어느 날, 경책으로 꽉 차 있는 방을 열어보고는, ‘저 경 속에는 무슨 좋은 말이 다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숭고심이 저절로 올라왔다. 그러나 책을 보려고 하는데, 마실에서 조금 공부한 것으로 익혀보려니까, 글이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그때부터 경을 배워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어디 심부름을 가면 책을 옷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읽을 정도로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다행히 은사스님이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어서 강당으로 가기 전 사집을 배우기 시작했다. 큰절에서 만들어놓은 방침은 아니었으나 여러 사람들이 스님에게로 책을 들고 배우러 왔고, 나도 그 틈에 끼어 불법에 눈을 틔워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는 한 절에 스님들이 몇 백 명씩 있었어도 강사나 법사는 겨우 한 명일 정도로 강사나 법사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금강산 마하연 같은 곳에서 강사스님을 초청해가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요행히도 나는 대강사였던 은사스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 스승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염이 우러나오곤 했다. 이력을 마치고 이 좋은 법을 나만 알면 안 되겠다 싶어 포교에 뜻을 두고 일본 임제전문학교에 가서 공부를 좀 더 한 것도 공부를 깊이 한 스승을 만난 복일 것이다.
통도사에서의 행자생활은 군대에서 지내는 것과 한가지였다. 스님이 죽으라고 하면 죽고, 살라고 하면 살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는, 그야말로 시키는 대로 복종했던 시절이었다. 공양도 짓고 김치도 담그고 불공 염불도 하고 상 차려서 손님도 접대하고 마당 쓸고 하는 갖가지 일을 다하면서도, 신심 하나로 뭉쳐져 있던 순수한 시간들이었다.
출가자는 무엇보다 첫째 신심이 있어야 한다. 신심이 있어야 번뇌의 근본도 끊어버릴 수 있으며 중노릇도 잘 한다. 신심만 있으면 부처님 말도 잘 듣고 부모님 말도 잘 듣게 된다. 그러므로 출가자의 첫 초발심 시절인 행자시절은 그저 신심 하나로 뭉쳐진 그런 시간들이어야 한다.

열일곱에 출가해서 올해 내 나이 여든일곱, 저 옛날 강당에서 함께 경책을 보던 서른 명이나 되었던 도반들은 이미 세상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발심을 불러 일으키게 했던 언동이 참다웠던 노장들도 벌써 다 떠나갔다. 사집을 다 마치고 스물두 살에 바랑을 걸머지고 금강산 마하연에서 공부하며 성철 스님과 탄허 스님 등을 만났던 일도 꿈처럼 흘러버린 지난 일이다. 한용운 스님을 잠깐 모시면서 그분이 무슨 말을 하시려나 긴장하며 존경심으로 우러렀던 저 옛날의 시간들도 꿈결같이 지난 일이다.
부처님께서 다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이라,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은 허망하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이 아니다. 거짓된 세상을 살고 가는 것이다. 나무껍질 파먹으며 꾸물대고 사는 굼벵이와 다르지 않다. 반딧불처럼 흘러가는 인생길에서 어제 꾸던 꿈을 오늘 또 꾸고 산다. 그러면서도 꿈이라 하지 않고 또 꿈을 꾸나니, 차라리 꿈도 깸도 없는 거기로 돌아가라! 생사 없는 그 도리를 찾으라!
이 세상 모두 허무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중이 되어서도 탐진치를 못 버리면 중생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오늘도 울고 내일도 울지만 왜 우는지 까닭도 모르고 울고 있는 게 인생이다. 가만히 앉아 자신을 챙겨보라. 관세음보살을 부르든지, 아미타불을 찾든지, 이뭣고를 찾든지, 한 생애 그걸 찾다 가라. 딴 거 없다.
한가로이 사는 이 늙은이에게 누군가 묻더라.
“그래, 경책을 보셨더니 불법이 뭡디까?” 하고. 그래 내가 이리 답했다.
“상도 없고, 모양도 없고, 완고한 게 없더라. 다 공했더라. 우리 사는 것도 다 공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