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나는 그다지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미국 헐리우드 풍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다. 미국 영화는 은연 중에 미국적 사고 방식을 그대로 우리에게 심는 것 같아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공부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 영화보다도 우리나라 영화를 즐겨보게 될 정도로 우리의 영화가 질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일본에서 ‘박하사탕’, ‘쉬리’, ‘친구’, ‘춘향전’ 등이 극장에서 상연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보기 시작했고 한국에 갈 일이 있으면 늘 화제작을 체크하여 틈틈이 보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영화 보기는 미국에 와서는 취미가 되어버렸다. 비디오에 의존하는 영화이지만 이제는 화제작은 물론이고 감독 중심으로도 보고 출연배우 중심으로도 보고 하여 많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의 중심지에 살고 늘 많은 미국 영화를 접하지만 나는 여전히 미국 영화는 그다지 흥미를 못 느낀다.
봄이 오니 이곳에서도 영화 이야기가 풍성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만다라’, ‘오세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이 포함된 각 나라의 불교 소재 영화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기사를 읽었고, 지난 2월 말에는 헐리우드에 있는 코닥 극장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도 하였다. 최우수 영화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선정되었고 이 영화의 주인공을 열연했던 힐러리 스왱크가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스트우드 감독은 96세의 노모를 모시고 나와 자기를 낳아준 것에 대한 감사를 하는 장면이 그 어느 것보다 인상적이었다.
배우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이스트우드 감독은 1971년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로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이후에도 확신에 찬 실력을 뒷받침으로 적은 예산으로 짧은 시간 안에 영화를 만들며 주연하는 배우에게 가장 많은 자유를 주는 감독이라고 한다. ‘밀리언달러 베이비’란 영화만 해도 불과 37일 만에 만들었다고 하니 여하튼 배우로서도 감독으로서의 그의 삶은 대단해 보인다.
이곳 LA는 영화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도시이다. 많은 영화사들이 있고 유명 배우들이 이곳 주변에 살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기 때문이다. LA 한복판 시내의 다운타운에서는 거리 전체를 막아 놓고 며칠씩 촬영을 하기도 하고 우리 동네에서도 늘 영화 촬영 차가 있어 가끔은 그 주위를 기웃거려보기도 한다. 영화촬영 현장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기에 촬영장에 커다란 트럭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감독과 배우들의 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여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더 컸다.
한편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입는 의상도 빼놓을 수 없는 세간의 관심거리이다. 아카데미 시상식과 함께 영화 속의 의상을 제작한 디자이너를 소개하고 영화 속의 의상을 그대로 전시하는 전시회가 있었다. 올해로 13번째인 의상전시회는 LA에서 유명한 패션 전문학교인 FIDA에서 열렸고 작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26편에 나왔던 100여 점의 의상이 전시되었다. 전시장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고 이 학교 학생들 몇 명이 의상들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바로 ‘밴 헬싱(Van Helsing)’에서 애나가 드라큘라 백작과 춤출 때 입었던 의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뒤로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을 영화로 만든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에서 크리스틴이 입었던 아이보리색 드레스와 디바칼로티가 입었던 핑크드레스가 눈길을 끌었다. 이 모두는 의상디자이너 알렉산드라 바이런의 작품으로 그는 올해 ‘네버랜드를 찾아서’란 영화로 의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속의 의상은 역시 시대물을 다룬 ‘트로이’나 ‘연인’ 등의 의상이 압권이었다. 특히 트로이의 의상을 담당한 밥 링우드(Bob Ringwood)는 BC 12세기의 역사적이며 민족적인 의상을 만들기 위해 이라크, 터키, 인도, 스리랑카, 중국과 영국 박물관 등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그와 그 회사의 사람들은 한 편의 영화를 위해 4개월 반 동안에 8천 벌의 의상과 만 짝의 신발을 만들었다고 하니 시대극에서 의상의 중요성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다.
장쯔이 주연의 ‘연인(House of Flying Daggers)’의 의상도 몇 벌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투명할 만큼 파란 대나무 밭은 물론이고 갈대밭, 단풍, 그리고 눈이 오는 풍광도 아름다웠고 영화의 시작에서 메이가 일하던 요정의 배경과 그 의상 때문에 마음을 사로잡았던 영화이다. 전시에는 금성무가 메이의 명성을 듣고 처음 요정을 찾아가 춤을 청했을 때 입었던 분홍 드레스와 메이의 비밀근거지에서 메이와 다른 이들이 입었던 녹두색의 긴 가운과 주성무가 입었던 당나라 시대의 관료 복장이 전시되었다. 이 의상의 디자이너는 에미 와다라는 일본 여성으로 주로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에서 의상을 맡았던 사람으로 영화계에서는 유명한 디자이너라고 한다.
옆 방에서는 전시에 나왔던 영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 의상들은 배우가 입고 연기를 할 때 살아나는 소품일지 몰라도 하나하나의 정성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 분야에는 문외한이지만 오랜만에 색 다른 기분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이번 주는 짧은 봄방학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일찌감치 방학 때 아이와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을 했다. 이번에는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영화 속의 소품이나 의상까지도 눈여겨보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