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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 미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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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5년 04월 278호
‘미산 스님’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화려한 학력을 떠올린다.
“아, 옥스퍼드 박사와 하버드 연구원 출신 스님!”
또한 영어가 수준급이라 불교통역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우리 사회에서 옥스퍼드와 하버드는 그 이름만으로도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설사 세속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출가자일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이 왠지 넉넉함이나 자비스러움과는 상반될 것 같은 선입견을 동반해 몸과 마음을 긴장시키는 요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중앙승가대 김포학사에서 만난 미산 스님은 예상과는 영 딴판이다. 둥글고 원만한 상호에 여성들도 부러워할 만큼 하얗고 깨끗한 피부, 부드러운 입가의 미소가 언뜻 동자승을 연상시킬 만큼 해맑다. 조근조근 차분하게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는 자상함과 남에 대한 배려가 묻어나는 한편 걸림없고 폭넓은 사고도 읽혀졌다.
스님은 출가 당시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차근차근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대부분 사람들은 스님을 겉으로 드러난 학력이나 이력을 보고 판단하면서 그 점을 궁금해 하지만 사실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어려서의 정진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풀지 못한 과제가 있기 때문이라며.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그런데 몸이 약했다. 집에 있으면 단명하여 스물 안에 죽을 수 있으니 스물까지만 절에서 살라면서 부모님이 백양사로 보냈다. 절에서 별명이 생영감.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말과 행동이 어른스러웠던 모양이다. 속명이 완두란다. 어쩐지 스님의 외모와 참으로 어울린다 싶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백양사 주지스님의 입적한 모습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스물 안에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난 것 같아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선방에서 공부하던 스님을 통해 “나고 죽는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참선”이라는 소리에 학교도 그만두고 무조건 선방스님을 따라나섰다.
물론 은사스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선방스님과 도망치듯 첫차를 타고 김용사로 가 다시 삭발을 했다. 그때가 진정한 출가시점이 될 것이다.
집에서도 찾아 나섰고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하루는 절에 내려가니 선생님을 비롯하여 60여 명의 급우로부터 편지가 왔다. 아이들이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와 같이 공부하자는 내용이고, 선생님은 절 생활이 어려워 나간 줄 알고 자기 집에서 학교를 다니라는 따뜻한 배려였다. 그러나 당시는 그러한 내용이 왜 그리 세속적으로 들렸는지 몇 개를 읽다가 모두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다.
거처가 알려져 부모님을 피해 동화사 강원으로 갔다. 그런데 강원은 원하지 않는 공부가 너무 많았다. 급한게 생사문제라 이거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원적암의 서암 스님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공양주를 시키시며 밥하는 거 불 때는 것 등등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하루에 딱 2시간 직접 데리고 앉아 계셨다. 나머지 시간은 손잡고 다니시며 나물도 뜯고 밭도 매면서 일상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셨는데 불을 때고 있으면 옆에 와서 허리를 쿡 찌르면서 “화두 들어”하고 다그치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서옹 스님이 계실 때, 봉암사에서 구참 스님들과 함께 정진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해이해져 처음 정진하는 이들에게 좋은 여건이라는 송광사로 갔다. 방부를 들여 달라 했는데 처음에는 구산 스님이 허락지 않았다. 하루 14시간의 가행정진을 하기에 너무 어리다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스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아침마다 예불 끝나면 구산 스님께 절하고 “생사대사 해결해야겠으니 방부 들여주십시오” 하고 청하고 나오곤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7일째 되는 날, 스님이 허락하셨다. 단 하루 8시간 정진하면서 한 철을 잘 살면 본방에 방부를 들여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반 철을 났을까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니 폐결핵 늑막 3기라 더 이상 정진이 불가능했다. 백양사에 내려가 치료를 받아야 했고 6개월 정도 지나니 괜찮아져 다시 선방으로 가려고 하니, 어머니를 비롯하여 주변의 권유가 시작됐다. 학교만이라도 마치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보니 3년 동안 죽음의 공포는 많이 사라짐을 알 수 있었다. 주위의 권유에 따라 중학교를 다시 들어갔다. 스님의 우수한 학력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국대를 졸업하고 선방과 유학 사이에서 갈등하다 유학을 결심했다. 먼저 스리랑카에서 1년, 인도의 뿌나대에 가서 3년간 원전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인도는 훈고학적 공부에는 도움이 되지만 비판정신이 없어 체계적인 현대학문을 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길을 찾다 옥스퍼드에서 유학 온 여학생으로부터 옥스퍼드대에 좋은 교수님이 계시다는 소식을 접했고 영국행이 이루어졌다.
지도교수와는 인연이 닿으려고 했는지 마침 경전읽기모임에서 초청해서 한국에 오셨을 때 통역을 맡았다. 나름대로 영어공부도 하고 통역기법도 익히면서 준비를 많이 했기에 결과가 좋았다.
덕분에 지도교수의 인정을 받았고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며 은혜를 많이 입었다. 옥스퍼드에서 6년 만에 ‘초기불교 찰나설의 기원과 발전’이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하버드대에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가서 1년간 세계 여러 종교를 전공한 학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동국대에서 한 학기 강의하다 서옹 큰스님의 권유로 백양사 운문암 선방으로 가서 정진하였다.
어려서 생각도 나고 이론적으로 공부한 것 정리도 되고 해서 참 좋았는데, 선방에서 공부할 업이 못 되는지 백양사 참사람수행원장을 맡아서 하라고 서옹 큰스님께서 권유하셨다. 외국서 공부해 영어도 잘하고 하니 니가 맡아서 해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이름이 장애가 되는구나 생각했으나 큰스님 말씀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지지난해 그러니까 2003년도 미산 스님은 총무원 사회부장이 되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법장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이 되면서 주요 3부장 즉 총무부, 사회부, 문화부의 수장들을 박사급으로 내정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 미산 스님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종단의 대사회 창구 역할인 사회부장직은 힘들지만 보람있는 일이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신계사 복원불사를 착공했고, 스리랑카의 수해복구 사업을 적극 도와 조계종마을을 조성하기도 했다.
굵직굵직한 일들을 처리하고 나니 학문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행정도 잘하더라는 칭찬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쳐가는 자리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재미도 의미도 있었다. 자신에게 정치적 성향도 조금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1년 3개월 만에 총무원 생활을 접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쌓아놓았던 학문적 역량이 녹슬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계기가 있었다. 마침 중앙승가대 포교사회학과에 정년 퇴임하는 교수가 있다는 소리에 흔쾌히 학교를 선택했다.
한국의 교육실정에서 입맛에 맞게 교수를 선택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그간의 과정을 통해 학문과 수행 포교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님을 충분히 인지하게 되었기에 지금은 학과를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다.
‘초기불교의 찰나설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관심분야가 교학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 수행과 포교에서부터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시사적인 면도 중시해 강의에 반영하고 있다.
지난 학기에는 선수행포교론이라고 해서 불교 전반의 수행법 즉 위빠사나니 간화선 등의 이론과 실습을 강의했고, 이번 학기에는 불교의 생태 생명학 강의를 개설했다.
천성산과 북한산 관통터널 문제와 같은 환경문제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생명 문제 즉 복제라든지, 인공유산, 안락사 등에 불교적 해석과 해답이 필요하고, 스님들 의식이 제대로 서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태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학기부터 영어 특강도 제대로 실시할 계획이다. 형식적 교양강의가 아니라 제대로 된 영어교육을 해야겠다 싶어 원어민 강사와 경험이 많은 한국인 강사를 초빙했다.
사회적으로 거센 영어교육 열풍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앞으로 영어의 비중은 점차 커질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불교의 대사회활동 비중이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스님들은 너무 뒤떨어져 있고, 스님들이 영어에 약하다보니 이 분야는 너무 미산 스님에게 의존하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빨리 후학을 키워야 한다는 다급함도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스님에게는 원칙이 하나 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피치 못할 일은 우선 순위를 정하기도 하지만 최대한 한 가지에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학생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한다.
스님은 현재 중앙승가대 교수직과 서울 상도동에 있는 백운암의 주지를 겸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강의를 우선한다. 스님들을 제대로 가르쳐야 그들이 불자들에게 제대로 포교할 것이니까.
사회부장 할 때도 대학의 겸임교수 제의도 있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두 가지를 하느니 한 가지에 두 배의 노력을 하자는 생각이다.
그러나 겸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으니 수행이다. 학문과 수행을 구분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지만 결제 때마다, 학문을 떠나 선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일년에 한 철 정도는 선방에서 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수행을 통해 생사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 이것이 미산 스님이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과제였고 출가 사유였다. 그리고 그것은 미산 스님을 지탱시켜주는 힘이며 출가자이게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지금도 생사대사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판단되면 열일 제쳐두고 훌쩍 떠날 준비가 돼 있다고 한다.
스님을 만나보니 번듯한 이력 이면에 보이지 않게 늘 간직하고 있는 오롯하고 순수한 의구심이 미산 스님을 진정 빛나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