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은 새벽부터 가늘고 고운 비가 왔다. 입춘 우수가 지난 지 십여일, 금년 들어 처음인가 싶게 봄비가 부슬거렸다.
학교 가기 싫어하는 딸아이를 모른 척 아침 먹여서 학교를 보내놓고 아내와 나는 느지막해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일이 그닥 바쁜 철이 아니어서 서둘 것이 없는 것이다. 커피까지 여유롭게 한 잔! 설거지 끝낸 아내가 큰 컵에 가득 커피를 타서는 마루 끝에 나앉은 내 옆에 붙앉았다.
아내나 나나 천생 게으른 주의자여서 커피잔 두 개 씻기를 싫어하는 까닭이다. 한 잔의 커피를 둘이 가늠하고 들여다보며 너 조금 나 조금 나눠마시는 것도 괜찮다, 참 괜찮다고 그 날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는 또 한편 아까 학교가기 싫어했던 딸아이를 떠올렸다.
이런 날은 학교 보내지 말고 이렇게 같이 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지 맘껏 비를 맞으며 집 뒤 산을 오르게 하던지 하루종일 방안에서 뒹굴거리게 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내가 아직도 타성에 젖어서 인지 아내와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가 않아서인지 모른 척 학교에 보낸다. 중 3, 남들 다 시키는 보충학습도 시키지 않고 고등학교 진학도 두고 보잔 식이면서 말이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렀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다섯 번, 여섯 번… 벨 소리가 무슨 말을 하랴마는 산 밑 외딴집의 이런 기분 좋은 적막을 깨는 전화벨 소리는 그 무슨 말이 있다. 아니 사실은 오십도 못된 소심증 있는 사람의 귀에는 전화벨 소리 자체만으로 기분 좋은 일인지 그렇지 않을지를 가늠하려는 못된 버릇이 있을 뿐이다.
“내싸둬, 갑갑하고 급한 일이면 다시 하겠지 뭐….”
아내의 채근을 애써 대수롭잖게 받았는데 끊어졌던 벨이 다시 울렸다. 금산사에 모셨던 시인 박배엽의 위패를 내소사 지장암으로 옮기고 1주기 재를 올린다는 전화였다.
전화를 해준 사람은 대학에 있는 심 선생이었다.
“날 궂어서 집에 있는 줄 아는데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어 이사람아, 자네 집에서 내소사가 멀지 않으니 좀 나와봐. 전주서 자네 아는 사람들 많이 왔어.”
심 선생은 나와 일년 사이를 두고 같은 문학지에 등단한 사이라 각별하게 지내는 처지인데 내가 워낙이 바깥출입이 없고 문단에 얼굴을 내놓지 않는 탓에 중요하다 싶은 연락은 꼭꼭 챙겨서 해주는 고마운 분이다.
‘… 그랬었구나, 까맣게 잊은 사이에 벌써 일년이 지나갔다니… 그는 죽은 혼령으로 금강산을 갔을까, 남의 땅을 밟고서는 금강산 안 간다고, 내 발로 걷고 걸어 당당히 삼팔선을 넘어서 가겠노라고 그는 시를 썼는데 그 혼령마저 삼팔선에 가로막혀 몸부림치고 있지나 않는지….’
갑자기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답답하여 전화기 앞에서 한동안 망연해졌다.
그러다가 일어나 내소사엘 갔다. 재를 올린다는 시간은 오전 10시, 지금은 11시. 어차피 시간에 맞춰서 가기는 틀린 일이라 나는 부러 천천히, 일주문 밖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천천히 걸었다.
모두 다 안에서 나지막히 염불 외는 소리만 들릴 뿐 법당 밖 토방마루 끝엔 신발들만이 가지런해서 나는 차마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루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지장암.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재라는 것이 어차피 산 사람들을 위안하는 거라면 박배엽, 그대는 죽어 우리를 지장의 품으로 넉넉하게 인도하는구나.
새 한 마리 이윽고 피안으로 사라지듯 허공으로 솟구치자 온갖 번뇌망상을 털어버리듯 한꺼번에 맺혔던 물방울들이 떨어지고 추녀 끝에 늘어졌던 나뭇가지가 다시 가벼워졌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누구 볼세라 지장암을 뒤로 하고 나는 혼자 일주문을 되내려왔다. 거기 막걸리집이 있었던가 - 한낮인데도 점심손님 하나 없는 일주문 밖 밥집엔 석유난로만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마수걸이일지라도 막걸리 한 병 시켜놓고 한 시간 앉아 있어 인상 찌푸리지 않을 얼굴의 주인이 안주를 챙겨다주고 하릴없이 신문을 뒤적일 뿐 지나가는 사람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술 한 잔을 따라놓고 나는 버릇처럼 부스럭부스럭 온갖 잡동사니 창고인 주머니를 뒤져서 종이 한 쪽과 부러진 연필 한 도막을 찾아냈다. 그런데서 티 내지 않으련다 하면서도 무슨 감정에 젖었는지 나는 시 한 편을 끄적거렸다.
파아란 색은 슬픈 색이다
꽃다운 것들이 하나 둘
스러져 갔어도
봐라, 봄빛은 저렇게
또 저렇게 싯푸러 오지 않느냐
귓가에 떠도는 너의 목소리
소리쳐
소리쳐 부르면
대답없는 몸짓만 넘실대면서
- 보리밭 -
봄비는 여전히 곱고 사람들은 아직 내려오지 않고 나는 술에 취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