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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꽃그늘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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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설세설 - 영덕 2005년 04월 278호
낮은 둔덕에 꽃다지와 노루귀가 지나갈 무렵, 생강나무 옆에는 구기자 꽃을 닮은 연보랏빛 작은 꽃이 마주 보며 봉오리 집니다. 곱지도 않고 이름도 모르는 터라 잘 살피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지만 남이야 보아주든 말든 서로 기쁘게 피고 집니다. 누군가 꽃은 산속의 달력이라더니 시절에 둔한 사람에게도 꽃이 지고 피는 일은 설렘입니다. 창밖 청매靑梅의 자태가 해오라기처럼 느리고 우아해서 바라볼 때마다 시선이 머뭅니다. 절 아랫마을에서 은어 어항을 만들면서 뽑아버린 것을 우연히 주워다 심은 것이 한 폭 수묵화가 되었습니다. 밤에 만나는 진한 매화 향기는 걸음을 멈추고 어둠에 젖게 합니다. 낮에는 둔하던 코가 밤이 되어서 예민해진 탓인지, 시끄러운 모든 경계에 분산되어 있던 비근鼻根이 어둠 속에서 비로소 완전해진 모양입니다. 마음을 쓰는 일도 분산되지 않아야 정신이 응집됩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정신이 하나에 응집되면 무슨 일이든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범부의 몸으로 부처를 이룬 수많은 선지식의 이야기는 덮어두고 사변 한마디 하렵니다.
며칠간 편서풍이 불고 나면 바람이 반드시 길을 돌려 하루 이틀 동남풍이 분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제갈 량의 오랜 자연 관찰과 집중 그리고 생각의 힘이었지요.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를 쫓았다거나 화공계火攻計를 후세에 전하게 된 것도 관찰과 집중 생각의 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던가요. 내재된 각고의 노력만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최상의 회향을 마련합니다. 일심법계一心法界가 벌어져 삼라만상이 이루어지니 한 점에서 시작하여 만법이 돌아가는 그곳이 어디쯤인지. 하늘은 하나를 얻어 청정해지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하며 신神은 하나를 얻어 신령스럽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 가득 차며 임금은 하나를 얻어 천하를 평정하나니, 하나를 얻으면 만 가지 일을 다 마칠 수 있다던 노자老子, 그 하나마저도 넘어선 자리가 반야의 진공眞空이러니.
밤 이슥토록 상념과 함께 꽃동산에서 배회합니다. 순간마다 육근六根의 장난에 울고 웃으며 굳어진 관념의 잣대로 분별하며 스스로 지쳐버린 오후, 여우를 피하면 호랑이를 만난다고 넘어진 땅에서 일어서리라 다짐하며 넉넉하게 마음 쓰기를 연습합니다. 더불어 잘 사는 길은 공통의 지적 관심사를 가지고 오랜 대화 속에서 인간 신뢰를 형성하는 것. 꽃처럼 화합하고 꽃처럼 속삭이며 꽃과 같은 세상, 꽃처럼 살다 가자고 아직도 늦은 밤 꽃그늘 속에서 오늘보다 좋은 내일을 위해 모두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