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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의 선율’ 진명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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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5년 02월 276호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벽이고 이어주는 것은 다리이다. 좋은 세상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과 사랑의 다리가 놓아진 세상이다.’ 법정 스님의 말씀으로 이 시간 시작해봅니다.
처음 사람과 사이에 벽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는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서로를 향한 불신과 미움, 욕심으로 두터워진 벽은…….”

‘차 한 잔의 선율’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멘트. 어찌보면 딱딱해지기 쉬운 교훈 같은 말씀일 듯 싶은데 진명 스님의 목소리에 담기니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마음 속을 흐른다.
이어지는 생쌍의 첼로협주곡♪~~
소리에는 묘한 마력이 있다. 마음을 흥분시키는 락음악이 있는가 하면 클래식의 유연한 선율은 가라앉힌다. 사람의 목소리도 다양하여, 우렁찬 목소리의 소유자가 있는가 하면 고음이 있고, 탁하기도 맑기도 하다. 그 소리의 파동에 따라 듣는 이의 바이오 리듬이 고조되기도 저조해지기도 하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음도 아니고 저음도 아닌 중저음의 소리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도 역시 중도를 지향하는 모양이다. 많은 이들이 진명 스님이 진행하는 ‘차 한 잔의 선율’을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 편안한 목소리. 남성적 저음도 여성적 고음도 아닌 중저음의 차분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아침시간의 분주함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을 듣는 이라면 누구나 소리로만 대할 수 있는 진행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기 마련이다. 진명 스님에 대한 그림들을 종합해보면 하얀 피부에 늘씬한 키, 구불구불 늘어뜨린 머리, 긴 손가락 등 한마디로 분위기 있는 여성이리라. 대상이 비구니 스님임을 인지했다손 쳐도 상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신비감이 더해질까.
스님의 성격은 인고의 여성미보다는 호탕한 남성적 분위기에 가깝다. 아니다 싶으면 마음속에 담아두기보다 그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해버린다. 그러다 일에 몰입하면 철두철미하고 여성적 꼼꼼함도 발휘하니 양면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다
실제 대화해보면 스님의 말투에는 간혹 경상도 억양도 묻어나고 속도도 좀 빠른 편이다. 외형적으로는 강하고 급한 성격이 짐작된다. 그런데 방송을 통해 전달되는 스님의 목소리는 잘 갈고 닦아 매끈한 관세음보살의 손끝 같다. 스님의 또 다른 내면인가…?

클래식 음악프로를 만들면서 진행자를 비구니 스님으로 내세운 것은 불교방송 개국 초기의 발상이었다. 전문 아나운서나 유명 연예인을 내세운 타 방송사와 차별성을 두자는 계산이었다는데 성공적이었다. 물론 비용도 엄청난 차이가 난다. 클래식과 비구니 스님의 조화가 예상보다 신선하고 좋다는 방송가의 평이 이어졌고 인기가 치솟아 지금까지 불교방송의 간판프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방송 초기, 정작 불자들로부터는 비난의 화살을 받기도 했다. 클래식이라는 서양음악 장르를 왜 불교방송에서 해야 하느냐는 항의와 당시만 해도 비구니 스님의 활동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자들의 의식도 많이 변했다.
진명 스님이 이 프로를 진행한 지는 8년째. 방송 초기 진행자였던 정목 스님에 이어 잠시 몇 명의 아나운서에게 맡겨지기도 했는데, 결국은 비구니 스님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임에 따라 진명 스님이 바톤을 이어받았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성악을 전공하려 했으나 중학교 때부터 몸이 약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출가를 하고 나서도 음악 듣기를 좋아했으나 강원에서는 음악 듣기를 금기시해 사물함 검사가 있으면 테이프가 쓰레기통으로 향해야 했다.
불교방송과의 인연은 법정 스님이 하시는 ‘맑고향기롭게’ 사무장을 맡으면서였다. 방송국에서 보이지 않게 환경운동을 하는 단체들을 소개하는 대담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1년 반 정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몸이 아파 방송을 쉬게 되었는데, 그때 목소리를 들은 방송 관계자들이 “차 한 잔의 선율” 진행자로 스님을 추천하였던 것이다.
그때가 97년 9월. IMF가 터지기 두 달 전이었다.
세속적 가치기준으로 본다면 시기적으로는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프로그램을 맡자마자 국가적 경제난국 속에서 불교방송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송국 사정이 어려워지자 스님은 진행을 맡은 지 얼마 안 돼 직접 원고까지 써야 했다. 원고는 방송작가가 쓰고 진행자는 원고대로 진행하는 것이 통례지만 IMF로 몰아닥친 한파는 스님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작가와 진행자의 1인 2역을 감당해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방송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덕분에 글을 쓰는 일이 피 말리는 일임을 그때 새삼 깨달았다. 그러다 보니 젊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더란다.
스님의 사이클은 24시간이 방송에 맞춰져 있었다. 누구와 대화할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늘 방송을 생각했다. 눈만 뜨면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클로징 멘트는 어떻게 멋지게 날릴까를 궁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진행되는 방송이 화두가 되어 몰입해 있었다.
출연료가 없다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월 40만원 정도. 그후 50만원에서 60만원 70만원… 점차적으로 교통비를 올린다고 했지만 현실적이지 못했다. 15년 전 개국 초기의 수준이 된 지가 겨우 1년이 좀 넘는다고.
불교방송 일을 한다고 누가 숙식을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고 서울 생활이라는 것이 돈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기에 스님의 마이너스 통장은 늘어만 갔다.
서울 중심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하나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한다. 방송국의 이런 전후 어려운 사정을 모르던 사람들이 ‘진명 스님, 출연료 많을텐데 좋은 데 가서 밥 한끼 사야지’ 할 때마다 설명을 할 수 없어서 난감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방송 일이라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무척 화려해 보이고 일반 연예인들처럼 생각해서 대단히 뭔가 수입이 높은 줄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면의 어려움을 아는 이는 그리 흔치 않다.
21세기 경제 논리에 맞추면 그렇게 실속 있는 일은 아니지만 또한 철저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방송 일이다. 게다가 스님 프로는 생방송이니. 올해부터 주 5일제 근무에 맞춰 토요일과 일요일 분을 녹음하고 있지만 그동안은 특별한 일 아니면 녹음은 없었다. 그동안 8년째 생방송 진행을 해온 진명 스님은 한 번도 펑크를 낸 적도 시간을 어겨본 적도 없다. 스님에게 방송은 수행 그 자체였다.

진명 스님에게 방송실은 용맹정진의 좋은 수행처다. 수행자에게도 30대가 왕성하게 공부하는 시기라면 40대는 공부가 깊어지는 중요한 시기이다. 스님은 수행생활의 그 중요한 40대를 방송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방송 시작할 때 가까운 도반들은 3년 결사 중이었다. 그때 스님은 ‘나는 방송실에서 3년 결사하겠다고’ 야무지게 마음먹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으나 방송국 사정이 허락지 않았다. 일이 고되고 출연료가 얼마 안 되어 그만두는 것 같아 눌러앉은 것이 5년이 되었고, 그때는 정말 그만두어야지 마음먹었다. 이 정도면 종비장학생으로 학교 다닌 것에 대한 회향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짐도 다 싸놓았다. 산으로 갈 예정이었다.
산촌에서 자라서인지 늘 산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도 방송국은 진명 스님을 놓아주지 않았다. ‘차 한 잔의 선율’의 청취율이 꽤 높게 나타난 것도 한 요인이었다.
어른 스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의외로 어른 스님은 그만하고 산으로 가라는 대신 ‘무엇을 하든 10년은 해야지, 5년 갖고 뭘 했다고 할 수 있느냐’며, ‘큰 포교를 하고 있다 생각하라’ 타이르시는 것이 아닌가.
밖에 내놓아도 손을 잘 안 타게(?) 생겨놓으니까 노스님들이 너무 안심하는 것 같다며 스님은 또 한번 호탕하게 웃는다. 그보다는 아마 어디에 있어도 변함없다는 진명 스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방송은 매력있는 포교장소이다. 큰스님 설법한다고 해도 불자들이 얼마나 모일 것인가. 그러나 방송은 보이지는 않지만 무수한 청취자들의 열린 귀를 향해 말을 하기만 하면 된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 해외에서도 듣고 반응을 보인다.
스님은 싸놓았던 짐을 하나씩 다시 풀었다. 그것은 큰 결단이 필요했다.
산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리면서 산을 가슴에 담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눈을 감고 산책을 떠난다. 어려서 뛰어놀던 산촌에도 가고, 공부하던 운문사의 숲길을 걷기도 한다. 솔바람 소리가 머리 속을 시원하게 지나가면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면서 시원함을 느낀다.
콘크리트 숲의 서울 한복판에서 지리산으로 산책을 할 수 있는 것은 스님만의 능력이다. 확실히 방송실을 수행공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주위의 어떤 이들은 방송이라는 것이 위력과 매력은 있지만 장기적으로 스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조언하는 이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노스님께서 10년을 말씀하셨듯이 ‘1등포교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방송 10년 결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 또 다른 어떤 길이 보이겠지….
한때는 방송 계통의 공부를 해볼까도 싶었는데 그것은 접고 있다. 나이도 무시할 수 없다. 새록새록 피어나는 후학들이 있고 그들을 도와주면서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곳저곳으로 숙소를 옮겨다니던 떠돌이 신세를 청산하고 일산에 작은 처소를 빌려 공간을 마련했다. 물론 사제들과 함께 마련한 셋집이다.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4월에는 봉불식도 갖는다.
올해는 스님에게 또다른 시작의 해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