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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방학인으로 보낸 나의 행자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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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무비 / 범어사 강주 2005년 01월 275호
아무래도 나는 경전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우리가 제대로 못봐서 그렇지 인연이란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경전의 한 구절을 듣고 발심출가한 일도 그렇고, 취학 전에 서당을 다니면서 한문공부를 익힌 것도 그렇고, 출가해서 제방의 내로라 하는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경전을 공부했던 것도 그렇다.
얼마 전엔 엠피쓰리로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을 다시 들었고, 선후배 수행자들의 담선 법문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면 출간될 “임제록 강의”를 병고와 마주하면서 썼다. 이런 얘기를 듣더니 누군가 물었다.
“스님, 아직도 그렇게 공부하는 게 재미있으세요?”
그렇다. 출가한 지 오십여 년에 가까운 세월임에도 나는 아직 공부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 아마도 그것은 출가 이래 가슴에 품고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화두, ‘무엇이 불법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요, 접근이었을 것이다.

자다가 생각해봐도 출가자가 된 게 그리 다행일 수 없는, 그래서 장난으로라도 한순간 다른 길은 생각조차 안 해본 이 출가의 길을 들어선 게, 십대 중반의 저 1950년대 말 언저리다. 내가 살던 마을 경북 영덕읍 남산동 이웃 마을에 덕흥사라는 불국사 말사가 내가 처음 가본 절이었다. 아마도 열너덧살 때였을 것이다. 어느 날, 할머니에게 늘 듣던 그곳에 갔다가 내 또래의 동자승에게 들은 그 한마디가 출가로 이어질 줄이야.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 마음을 휘어잡은 경전 한 구절을 만난 것이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년보배千年寶貝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라.”
감정을 잘 잡아서 어린 스님이 《초발심자경문》에 나오는 그 구절을 외워놓고 ‘삼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띠끌(먼지)이라’ 하고 풀이를 하는데, 아주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취학 전에 서당엘 두 해 동안 다니면서, 《천자문》, 《동몽선습 계몽편》, 《명심보감》, 《통감》까지 배운 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려서니까 글자를 익히는 정도였겠으나, 그래도 그것이 도움이 되었던지 그런 얘기 들으니까 마음에 깊이 와 닿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동자승이 하는 얘기가 또 기가 막혔다. “화호화피난화골畵虎畵皮難畵骨 지인지면부지심知人知面不知心이라”, ‘사람이 호랑이를 그리는데 가죽은 그릴 수 있으나 뼈는 못 그린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얼굴을 아는 것이지 그 마음은 모른다’라는 소설 《장자》에 나오는 그 말은 또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아 공부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되면서 그만 출가의 마음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면서 공부에 재미를 느끼고 있던 그 동자승은 지관스님의 동생이었다. 내가 나중에 해인사 강원에서 강주로 계시던 지관 스님께 공부를 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다음날부터 흥덕사를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반출가승처럼 지내다가 ‘속가와의 인연을 모두 끊고 큰스님 밑에서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정식 출가한 것이 1960년, 열일곱일 때였다.
그저 상식으로 이 나라에서 제일 큰 절이거니 하여 홀로 결단해서 찾아간 곳이 불국사였다. 대중스님과 행자의 구별이 크게 없던 그 시절, 불국사에 가서 첫날 한 것이 ‘오늘 저녁부터 대중들과 공양을 해야 하니 바루 펴는 법부터 배워라’ 해서 그것을 배우고 탁자 밑에서 대중과 함께 바루공양을 한 것이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어서 한 식구로 취급당했고,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면서 한 주 정도 있다가 사미계를 받았으니,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혹독한 행자생활을 보내진 않은 셈이다. 덕분에 겨우 《반야심경》과 예불문만을 익혔을 뿐이고 《천수경》을 외우지 못하고 중이 되어버렸다.
당시 불국사엔 강원이 없어 한두 달에 한 번 이삼일씩 정도 특강으로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는데, 경전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범어사로 가야 한다고 해서 몇 달 있다가, 법어사 강원에 입학했다. 그런데 무엇이든 뛰어넘는 복이 있는 모양인지, 초심만을 조금 배우다가 왔으니 치문반에 들어가야 하는 게 순서였으나 치문반이 없는 까닭에 서장반엘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함께 공부한 도반들이 나의 사형인 통광 스님과 무진장 스님 등이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파커 만년필을 가지고 있었던 무진장 스님에게 책을 가지고 가서 사인을 받았던 일이다. 나이로 보나 공부로 보나 우리보다 앞섰던 무진장 스님은 우리가 철필로 잉크를 찍어 쓸 때 멋진 파커 만년필로 글을 아주 잘 썼던 분이다. 책이 없어 삼경 치고 나면 남의 책을 빌려서 공책에 베껴 써 교재로 삼았던 시절이었다.
《초발심자경문》과 《치문》을 다 배운 사람들과 공부를 하자니 처음엔 아주 힘이 들어서 혼났다. 그래서 은사스님인 여환 스님께 “너무 힘들어서 강원생활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중이 결제를 했으면 해제를 하고 나가야 한다. 결제 때는 부모가 죽어도 나가는 법이 아니다” 하시는 것 아닌가. 그 말씀을 듣고 다시 아둥바둥거리며 한 철 그렇게 공부를 하니 재미도 붙고 도반들과 실력도 비슷해졌다.
선문에 밝아 지견이 뛰어났고 선문 강의를 좋아하셨던 강사스님 성호 스님께 알뜰하게 《선요》를 배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범어사에서의 생활은 9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3시에 일어나는 생활이었다. 보통은 삼경을 알리는 종을 치고 나면 화장실에 다녀와서 잠자리에 들게 마련인데, 당시 범어사 학인들은 불을 다 껐는데도 반수 이상이 앉아서 참선을 하곤 했다. 동산 스님께서 주석하시면서 선방을 운영하고 계실 때였으니 범어사의 선원은 물론 강원까지도 참선의 열기가 대단했었다. 출가 처음부터 선방이 그렇게 내 맘에 자리잡고 있어 나중에 해인사로 가서 강원을 졸업하던 날, 일주문도 안 나가고 선방으로 갔던 기억이 새롭다.
범어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정화한다고 은해사에서 학인을 꾸러 와서 내가 차출되어갔다. 그곳에서 공부가 깊은 각성 스님께 공부를 하고 해인사 강원으로 가서 강원생활을 마무리했으니, 나는 ‘통방학인通方學人 남행강사南行講師’로서 행자시절과 학인시절을 보낸 셈이다. 어느 한 절에서만 공부를 하는 게 아니고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공부하는 학인을 통방학인이라 일컫는데, 견문이 넓어 무서운 사람으로 통한다. 또, 남행강사라는 것은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가면서 53선지식을 친견해서 훌륭한 수행자가 되었듯이 한 스승 밑에서만 공부한 게 아니고 여러 스승 밑에서 공부해서 강사가 된 사람이다. 나는 학인시절부터 제방을 다니면서 훌륭한 강백들 회하에서 공부를 해 견문을 넓혔고, 선방을 운영하고 있는 제방의 선지식들은 다 찾아가서 공부를 했다. 전강 스님, 효봉 스님, 성철 스님 등의 문하에선 서릿발같은 선원의 정신을 배웠고 관응 스님, 탄허 스님, 운허 스님 등의 선지식들에게선 경전의 심오한 세계를 공부하면서 ‘무엇이 불법인가’에 대한 나의 평생 과제에 접근했다. 돌아보면 나는 스승복이 많은 청복의 수행자였다.

뜻하지 않게 지난해 병고를 맞이해서 마음공부를 단단히 하고, 몇 달 전 행자시절을 보냈던 범어사 강원채로 돌아와 있다. 병원에서 돌아와 벽장 속에 있던 포대 화상을 꺼내어 닦아서 책상 위에 모셔놓았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면, 그처럼 걸림없는 넉넉한 미소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행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무위진인無位眞人. 참사람. 비교할 수 없는 참사람, 차별없는 참사람, 어떤 상태에도 머물지 않는 사람. 어떤 모습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 오직 나 한 사람.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고 색깔도 없는 사람. 그러나 그 모든 것인 사람.”
《임제록》에 나와 있는 이런 참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몸도 마음(지식)도 오늘 이 시간, 충분히 쓰고 싶다. 상해가고 변해가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