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림 농산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맑은 땅 좋은 벗 - 안혜령
1999년 02월 204호
1986년 12월 4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쌀가게 하나가 새로 문을 열었다. ‘한살림 농산’이라 쓰인 간판 내건 외양이야 여느 쌀집과 다를 바 없었으나, 담긴 뜻은 크고도 깊었다. “모든 생명을 함께 살려”내는 “생명의 가치관, 세계관으로 온 생명이 한집살림 살 듯 더불어 살자”는 생명공동체의 이상이 ‘한살림’이란 한마디에 담겼으니, 그 이상을 실현할 방편으로서의 쌀집이었다.
온 생명의 한살림을 위해서 “생태계의 질서에 맞는 생산과 생활 양식을 이루어간다”고 마음먹은즉, 충북 음성과 강원도 공근에서 생산된 유기농 쌀과 유정란을 직접 가져 다 팔았다.
십이 년이 지나면서 쌀가게는 ‘사단법인 한살림’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출자하고 참여하는 생활협동조합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덩치도 커져서 서울 한살림을 비롯하여 전국 주요 도시 일 곱 곳에 지역 한살림들이 자리잡아 도시와 농촌의 유기농산물 직거래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다루는 물품도 유기농산물과 그 가공품으로 확대되어 연간 삼백 가지가 넘으며, 이들을 공급하는 생산자가 전국에 삼백 명쯤, 그 물품을 받는 소비자회원이 전국적으로 이만 가구쯤 된다. 그 중 만육천 가구쯤이 몰린 서울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데, 우리나 최초의 유기농산물 직거래 물류센터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서울 시내 두 곳에 지부를 두었으며, 분당, 일산 같은 신도시까지 해서 모두 아홉 군데에 매장을 꾸리고 있다.
규모는 훨씬 못 미치지만 지역 한살림들도 나름대로 특색있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광주한살림은 생산 활동이 중심이고, 부산한살림은 문화운동과 관련된 활동이 활발하며, 원주한살림은 해마다 조합원 주말농장을 개설하고 있다. 대구한살림에서는 두레공동체를 세워 나가고 있다.
외견상으로 실하게 컸을 뿐 아니라 살림을 키워 오면서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도 크다. 생명사장을 새로운 가치관으로 선보이고 정립했으며, 개인의 일상사에 그치던 ‘밥’의 문제를 사회적 관심사로 확대 시켰다. 유기농산물의 도농 직거래 운동을 성사시켰으며, 이 나라소비자협동조합운동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한살림 이전에 공산품만을 다루던 소협들이 바뀌어 한살림이 ‘소비자’를 버리고 ‘생활협동조합’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그 뒤를 쫓았으니, 지금에 와서는 우리나라의 생협, 곧 생활협동조합들은 한결같이 유기농산물의 도농 직거래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런 생협이 전국에 칠십여 곳이 된다 하니, 저마다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우리 농산물을 살려 나가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현실적 노력에서는 다를 바 없다 하겠다.
한살림 운동의 발원지는 원주 지역이다. 흔히 민주화 운동의 메카로 불리는 원주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신용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된 곳이기도 해서, 천주교원주교구의 카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민주화운동과 농민운동, 협동운동이 벌어진 곳이다. 그 운동가들이 20세기를 지배하며 도도히 흐르는 산업기술문명의 대세를 거슬러 새로운 문화, 좀더 근본적인 삶을 위한 운동을 모색한 것은, 그 산업기술문명의 폐해인 환경 문제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팔십대 이전부터였다.
날로 피폐해져 가는 농촌 현실의 한복판에 있던 이들은 “메뚜기가 없어지는 것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이 있는가” 같은 의문을 화두로 품게 되었고, 생명 자체가 위협을 받는 시대 상황에서 “몫의 정당한 분배”라든지 가치관의 변화 없는 “정치 권력의 민주화”라는 기존의 운동논리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한살림 운동에 돌아가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큰 정신적 영향을 끼쳤음은 널리 알려진 바다. ‘동학의 한울님사상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생명계의 모든 이웃들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보증하는 생명사상으로 읽어내고, 이것을 현실의 사회 생활에 적용하여 한살림공동체운동으로 풀어 내었다’ 고 ‘녹색평론’의 김종철 씨가 소개한 바 있듯, 선생은 한살림운동의 구상에서부터 정신적인 중심 역할을 했다.
그 정신적인 지도아래, 이 일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한살림’ 이름을 지은 당사자인 박재일 회장 개인적으로는 “더 큰 스승이 되어 주던” 원주지역 농민들과 운동가 들이 아니었다면 한살림공동체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밥이 곧 하늘이다”라는 가르침과 “생명의 젖줄인 밥과 밥을 생산하는 튼튼한 농업 없이는 인간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간단 명료한 이치를 진작에 제 삶 속에서 깨우치고 있던 이들이었다.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이라는 새 운동의 정신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새로운 생각이 현실로 살려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바른 농사를 짓는 농사꾼과 이를 먹어 줄 소비자가 함께 있어야 하는 법. 무농약 쌀도 정부 수매벼에 묻혀 그대로 시장에 내다 팔리던 때였다. 생명의 참뜻을 제대로 알리고 도시와 농촌을 하나로 묶는 실천적인 사업으로 유기농산물 직거래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가게를 열기까지 천주교 원주교구와 독일 천주교 단체인 미세레올의 재정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초기에는 회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름아름으로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배달해 주는 게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직거래의 기본 원칙인 ‘책임있는 생산, 책임 있는 소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씨 뿌리기 전에 김장 배추를 주문해 놓고는 배추 나갈 때가 되면 주문한 적이 없다 한다든지 가져가지 않는 식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88년에 한살림 공동체 소비자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뒤이어 체계적인 물품 생산과 농촌 지역에서의 한살림 운동추진을 위해 생산자협의회가 만들어 졌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무농약 쌀값 공동결정회의를 가졌고, 그 해 11월에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교류 잔치마당’을 열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공생협동운동이 전무하던 시절인지라 그 만큼 뜻 깊은 일이었고, 사회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모았다.
이 해에 또 한살림 운동의 이념적 토대를 다지고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한살림 모임’이 만들어졌다.
장일순 선생과 김지하 시인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참여하였으며, “오늘의 죽임의 문화를 철저히 진단, 반성하고 그 대안을 찾으며 실천의 방도를 세우”고자 하는 설립 취지가 담긴 ‘한살림 선언’을 발표하여 국내외에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모임은 한살림 강좌와 무크지 발행 등의 활동을 벌였으나 운영 자금과 실무자의 부족으로 뒤에 사단법인 한살림안에 통합되었다.
90년대 들어 한살림은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사람이 늘고 기구가 커지다 보면 서로 부대끼는 일도 잦아지기 마련이다. 유정란의 품질 문제를 둘러싼 소비자와 생산자사이의 갈등으로 생산자협의회가 해산된 일은 그 가운데서도 뼈아픈 경험이었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건강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협동의 정신이 그리 쉽게 몸에 젖어 들기는 어려운 일일 터였다. 주문한 채소가 부실하다든지 공급이 연기되거나 중단되었을 때 소비자들은 불만을 토해냈고, 소비자 믿고 키워 놓은 작물이 시중시세에 견주어 조금만 비싸다 싶으면 아예 눈밖에 밀려나 썩혀 버리게 될 때 생산자들은 속이 터졌다.
한살림 운동을 “배부른 사람들의 배부른 짓거리”라고 뜨악해 하거나 노력은 가상하나 현실적으로 무슨 대단한 효과가 있겠느냐는 냉소적인 눈
들은 한살림 식구 모두가 넘어야 할 장애였다.
그러나 이런 갈등과 반목, 시행착오를 한살림 식구들은 잘 이겨냈다. 생산지에 방문하여 일손 도우면서, 단오생명 대동굿과 가을걷이 추수 한마당에서 한판 어울려 놀면서, 어린이 여름 생명학교에서 아아들 뒤엉켜 살면서 타성과 편견의 두터운 벽이 조금썩 허물어져 갔을 성싶다. ‘나’가 깨어지면서 물품 공급 일 주일 전에 주문하기, 아파트 입구에서 물품 받기, 생산지 물품과잉 생산 때 더 먹고 부족할 때 나누어 먹기 같이 까다롭고 번잡한 절치를 기꺼이 감수하고, 농약 예닐곱 번까지는 자체적으로도 허용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농약 안치고 버티다가 한해 과수농사 망치고야 말기도 한다. 삶의 ‘근본’을 구하는 마음이 서서히, 단단히 뿌리내리기에 가능한일이 아닐까.
‘한살림 생활협동조합’ 으로 이름을 바꾼 93년에 사단법인 인가를 받으면서 한살림은 소비자와 생산자, 실무자가 다함께 ‘사단법인 한살림’안에 통합되어 참여하는 조직과 제도를 구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유기농산물 직거래와 함께 한살림이 펼친 여러 사업들을 살펴보면 실로 우리나라 녹색운동의 선구자라 할만하다. 외국산에 의해 사라진 대표적인 우리 농산물이자 주요 곡물인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일으켰으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재생휴지를 쓸 것과 합성세제 안 쓰기 운동 등을 벌였다. 또 폐식용우를 활용한 재생비누 만들기 운동을 벌이는 한편, 도산직전에 있던 협성생산공동체에 투자하여 폐식용유를 이용한 비누공장을 만들었으니, 물을 살리고 자원을 재활용하는 운동이 지속되고 확장되는데 큰 힘이 되는 일이었다.
충북 괴산 지역 농민들과 함께 ‘흙살림 연구소’를 만들어 이 연구소를 통해 미생물 농자재를 보급하고 기술지도를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으며, 음식물찌꺼기 퇴비화 연구를 시작했으니, 이 또한 한살림이 이룬 큰 일의 하나이다.
생산자들은 생산지들대로 지역별, 작목별 모임 등을 통해, 도시 소비자들은 또 그들대로 지역별, 연구 과제별 작은 소모임들을 꾸준히 꾸려가고 있는 것은 협동의 삶을 알리고 넓혀가는 일이라 하겠다. 특히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도시에서, 동네 모임마다 환경 공부도 하고 재생비누도 만들면서 건강한 밥상 만들기에 앞장서는 이가 주부라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일이라 하겠다.
단순히 소비자 회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주부들은 지부살림을 꾸려가고 매장운영을 책임지며 총회와 이사회에서 한살림의 정책 방향이나 쌀값 따위를 논의하고 결정한다. 도시 한살림운동의 좋은 사례로 꼽히고 있는 도봉지부는 서울시내 60개 남짓한 시민단체협의회 가운데에서 가장 알뜰하고 내실 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야무지게 지부운영을 해 나간다.
한살림 회원으로서 가장 큰소득을 ‘닫혀 있던 눈 떠 넓히고 그 생명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가치관의 변화’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지부장처럼 여기에 참여하는 모든 주부가 이런 본성의 변화를 겪게 될 때, 제 밥상 살리는 운동에서 모두가 공생하는 삶의 운동으로 나아가고자 나설 때 한살림운동은 우리 사회의 대세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한살림 운동이 안고 있는 과제도 적지 않다. 조직이 커진 반면 전반적으로 한살림의 정체성과 지향점에 대한 의지가 희박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특히 회원들 사이에 이런 정체성 공유와 사회화가 부족하다 지적되는데, 이는 초기에 견주어 ‘대단히’ 누그러진 가입 조건도 한 원인이 아닌가 싶다. 초기에 일곱에서 열 세대가 한 단위로 묶여 함께 물품을 주문해야했던 것이 이제는 “사만어치 이상”이라는 단서는 붙되 한 세대로 바뀌었으니 그만큼 공동체 의식의 약화를 불러올 수도 있는 일이겠기에 말이다.
“한살림이 성장하는 속도가 세상이 흘러가는 속도보다 빨랐다면” 이런 타협은 없었을 터이나, 그렇다면 거꾸로 이제 좀더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사업과 활동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울 한살림에 가장 절실한 문제일 터인즉, 그렇잖아도 지역 단위에서 대중성을 갖는 프로그램 개발에 골몰하고있다.
이 몇 년 새에 회원이 해마다 천오백 명 이상씩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의 유기농산물 바람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댐 농산물을 살리고 땅을 살릴 뿐더러 유기농산물로써 도시와 농촌이 연대의 끈으로 엮이고 있으니 이 끈이 탄탄해지면 질수록 공동체적 삶의 확산도 빨라지지 않겠는가.
대구 한살림은 공생농두레라는 농업회사를 세우고 땅 철천 평을 마련하여 두레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농업을 중심으로 우리 삶이 재정비되는 ‘농적 문화’를 새로운 대안으로 본다면 농촌공동체를 되살림은 가장 확실하고 튼튼한 운동일터인즉, 서울 한살림에서도 그런 공동체 농장을 마련하고자 준비중이다. 마음이야 각 도마다 그런 마을이 하나씩만 있어도 좋겠다 싶은데, 장일순 선생 말을 빌자, “혼들리지 않는 하나의 뿌리”를 갖고 “성급하지 말고 형편 되는 대로 마음 바쳐서 꾸준하게 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