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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월불인冬月不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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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서연 2005년 01월 275호
빗방울이 뒤란의 마른 수숫대를 때리는 소리가 제법 컸다. 낙숫물 듣는 소리도 들렸다. 바람이 부는지 마가목과 산사과나무는 몸을 떨며 울었다. 청허淸虛의 시에 “새가 우니 산이 더욱 고요하다(鳥鳴山更幽)”고 했던가. 빗소리와 바람소리를 듣고 있자니 과연 겨울밤이 새삼 고요한 줄을 알겠다. 자시子時 무렵쯤 됐을까. 문득 낙숫물 듣는 소리가 멈췄다. 무슨 사단이 벌어졌으리라 직감했다. 한지를 바른 격자문을 열었다. 아아, 펄펄, 함박눈이었다. 그새 빗방울은 흰 꽃잎으로 그 몸을 바꾸고 있었다. 무심한 빗방울 속에 어찌 저리 고운 꽃잎이 숨어 있었을까. 떨어져 내리는 꽃잎들은 방안에서 새어나간 불빛에 은빛 가루처럼 반짝거렸다. 참으로 무상無常한 겨울밤이었다.
겨울이 어느 사이 깊었다. 산중의 납자들에겐 동안거철인 이 계절이, 농부들에겐 농한기라는 무미건조해 뵈는 말로 불린다. 농사가 한가하다고 해서 농한기이다. 그러나 겨울을 농사 없는 계절이라고 치부해둘 수만도 없다. 마음 농사는 농사가 아닌가. 그러니 겨울은 또 이 어수룩한 농부에겐 도리 없이 농사철이요, 안거철이기도 하다. 벌써 여러 해째 겪어온 일이지만, 농사가 한가한 겨울 한 철을 무사無事하게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 농사란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아마도 몸이 한가하면 ‘농한기’요, 마음이 한가하면 ‘안거’가 아닐까 싶다. ‘동지 섣달 기나긴 밤’이라 함은 꼭 밤이 길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마음속에서 사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겨울밤은 길고 또 길기 마련이다.

북미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겨우살이를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그곳에도 ‘동안거’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우선은 월력月曆에 붙인 수사가 대단히 철학적이고 영성적이었는데, 그게 만만찮았다. 12월을 두고 크리크 족은 ‘침묵의 달’이라 부르고, 퐁카 족은 ‘무소유의 달’이라 불렀다. 1월에 대한 표현도 아름다웠다. 어떤 종족은 ‘눈이 천막 안으로 휘몰아치는 달’이라 하고, 또 어떤 종족은 ‘눈송이에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이라 했다. 그런가 하면 그 눈 덮인 천막 안에서 내면 속으로 깊이 침잠했던 아리카라 족은 1월을 ‘가슴 깊은 곳에 머무는 달’이라 불렀다. ‘안거’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디언들이 말한 그 ‘침묵’과 ‘무소유’와 ‘가슴 깊은 곳에 머무는’ 것, 바로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안거의 덕성을 드러내주는 것이 아닌가.
농사법에도 농부의 ‘침묵’이라는 게 있을까. 올겨울을 나며 곧잘 자문해보는 물음이다. 얼핏 생뚱맞은 물음 같다. 짧게 답하자면 ‘침묵’은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어렵게 만날 수 있는 것이지만, ‘침묵’은 충분히 가능한 명제이다. 농업 행정에서 쓰는 말로 친환경 농법이나 유기 농법이라는 게 있다. 농약이나 제초제 같은 약제랄지 화학비료랄지 그런 농자재를 전혀 쓰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투입해서 농사를 짓는 방식을 말한다. 이런 농법에는 관官이나 제도권의 유관 기관에서 생산해내는 수많은 농업 정보와 영농 기술이 뒤를 따른다. 그러나 농사를 영농 기술과 같은 자연과학적 측면으로만 접근하면 농사의 실상과 참맛을 만나기 어렵다. 접근하기에 따라서는 농사에는 인문적 요소도 풍부하다. 현장에서 만난 눈 밝은 농부들 중엔 이른바 농업 정보랄지 영농 기술이랄지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분들도 종종 있었다.
일본인 농부 후쿠오카 마사노부(福岡正信)는 ‘자연 농법’을 주창하기도 했다. 그는 땅을 갈지도 않고, 비료와 농약도 주지 않고, 풀도 뽑지 않았다. 그는 농사에 인간이 개입하는 걸 최소화했다. 인위와 유위를 배제했기 때문에 그의 ‘자연 농법’은 ‘무위無爲’의 농법으로도 불렸다. 그와 닮은 농법으로 이 땅에선 ‘태평 농법’과 ‘생명 농법’을 주창한 이도 있다. 혹은 작물과의 대화를 생명으로 삼는 ‘영성 농법’을 내세우기도 하고, 더러는 ‘음악 농법’을 실험하는 농부도 있다. 음악 농법만 해도 어떤 이는 작물에게 사물놀이 음악을 들려주고, 또 어떤 이는 수제천壽齊天 같은 정악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클래식이나 명상 음악을 들려주는 이들도 있다.
이런 농법들의 중요한 공통점은 제도권의 영농 기술과 같은, 인간 중심의 가치 판단을 담고 있는 농법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관행적인 농사 지식 따위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들 농법은 모두 ‘무위’라는 말처럼 농사에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작물과의 직관적 ‘소통’을 모색하고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농부들에겐 고전적인 잠언 하나가 있다. “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 역시 농부와 작물과의 ‘소통’의 문제를 적시한 말이다. <식물은 왜 바흐를 좋아할까?>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그 책에 붙은 부제는 ‘우리가 정말 몰랐던 식물의 사私생활’이었다. 이 역시 인간이 식물에 대한 선입견을 포기하고 식물과의 내밀한 ‘소통’을 탐색하는 게 주제였다. 나는 이 같은 ‘무위’와 작물과의 직관적 ‘소통’이야말로 농부가 농사에서 보여줄 수 있는 ‘침묵’의 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농부의 이 ‘침묵’은 인디언의 침묵과도 통하고, 명상이나 선禪에서 말하는 침묵과도 통한다.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온전한 소통은 자아나 자의식이 준동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선가禪家의 한 구절, ‘단막오염但莫汚染!’ 사량분별을 내지 않는 마음, 그게 바로 ‘침묵’이 아닌가. 깨어 있는 농부는 농사법에서 그 나름으로 ‘침묵’을 학습하고, 마침내 ‘침묵’한다.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안거철에 침묵은커녕 사념만 너무 많은 게 아닌가. 더욱이 ‘언어’를 통해 ‘침묵’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동안거 입방을 앞둔 한 지인이 토굴로 떠나기 전 어느 달밤에, 글 한 편을 써 건네주었다. “동월불인冬月不仁”(겨울밤의 달은 어질지 않다).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공부하는 중에 달을 만나거들랑 그 달이 ‘불인’함을 부디 잊지 마라.” 서늘한 바람 한 줄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서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을 만났을 때처럼 소름이 돋았다. 이 겨울에 공부가 흐트러지고 마음이 산란할 때마다 그 ‘불인’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