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외와 종교:칼 마르크스(Karl Marx)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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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뭐꼬 - 법진 / 해인강원 강사
2005년 01월 275호
“마르크스는 인간이 정치, 과학, 예술, 종교를 추구하기 전에 먼저 의식주 해결을 우선시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프레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칼 마르크스 무덤 옆에서 연설(Speech at the Grave-side of Karl Marx)》)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계급투쟁 이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단호한 어조로 ‘지금까지 존재했던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새로운 역사의 관점을 내놓았다. 자유민과 노예, 평민과 유격대, 귀족과 농노, 장인과 품팔이꾼, 한마디로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들 사이에는 늘 대립이 있었고, 급기야 그 대립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혁명적인 사회를 재구성하거나 또는 갈등을 겪고 있는 계급들을 폐지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에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은 이 세상에 살기 시작한 이래, 거대한 사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매우 기본적인 물질적인 것에 의해 삶의 동기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유물론적 관점을 가진 역사관의 첫 번째 출발점이 된다.
모든 사람은 의식주를 필요로 하며, 일차적으로 이러한 것들이 충족되고 난 후에 섹스 등을 비롯한 다른 사회적 욕구가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재생산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이는 또 다른 차원의 물질적인 요구와 욕망을 만들어내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것들을 묶어 ‘생산양식’의 발달이라는 틀로 이해하였다.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은 사냥이나 채집, 고기잡이, 농경, 또는 다른 단계의 노동을 통하여 이루어낼 수 있다. 게다가, 다양한 인간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노동 행위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불가피하게 노동의 분화를 이루어낸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형태로 노동을 나눈 사람들 사이의 연대 또는 관계를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라고 하였다. 내가 배를 만드는 사람일 수 있고, 너는 고기를 잡는 어망을 만드는 사람일 수 있다. 마르크스가 원시공산사회(primitive communist)라고 부른 가장 단순하고 초보적인 사회에서, 배와 어망은 한 마을에서 모든 사람에 의해 공유되어, 각기 모든 것을 필요에 따라 공유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원시공산사회는 한마디로 인간의 조직 가운데 가장 자연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가를 즐기는 등 다양한 형태의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개별적인 자아에 대해 역시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유재산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고 그리고 계급문명으로 알려진 역사 단계에서 그 영향력이 분명해짐에 따라, 운명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생산관계가 크게 바뀐 것이다. 배를 만드는 사람은 배가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고, 어망을 만드는 사람은 어망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이 만들었던 것에 대해 소유물을 매매함으로써 서로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많은 사유재산을 얻었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상태로 소외되고 말았다. 게다가 생산양식이 수렵과 채집에서 농경으로 바뀜에 따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엄청난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생산물뿐만 아니라 곡식이 자라는 땅 등 생산수단까지 소유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이들은 배타적인 지배자로 성장하였다.
반면에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하인이나 보조자, 또는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초기 문명의 지표가 된 사유재산과 농경은 인간성 파괴라는 위기를 불러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권력과 부에 따른 계급의 분화로 인해 영속적인 사회적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중세의 생산양식은 여전히 농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계급갈등의 구조는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변화라고 해봐야 장원의 군주와 농노가 고대의 주인과 노예의 자리를 대체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장인들 사이에서도 전문가 공인과 그들의 수련공들은 로마의 장인과 보조자들 사이의 오래 된 갈등을 답습하고 있었다.
근대 시민사회의 발전 단계에서도 이와 같은 구래의 계급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었지만, 그 갈등의 골은 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것이었다. 근대의 자본주의는 무역과 공장화 등 새로운 생산양식을 도입하였고 생산 관계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넓은 범위에서 상업 행위와 이윤 추구가 도입됨으로써,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조아(bourgeoisie) 또는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많은 부를 가져다주었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노동자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로 소외되었다.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노동을 소유자 또는 경영자에게 제공함으로써 생계에 필요한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악조건은 자본주의가 산업화됨에 따라 훨씬 나빠졌다. 공장노동자들은 물품을 대량 생산하는 기계와 함께 자본가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다. 이와 같은 산업자본주의가 널리 확산되자 계급들 사이의 갈등은 가장 절망적인 단계임을 암시할 정도로 최고조에 달했다.
프롤레타리아의 빈곤이 극에 달해 있었으므로 노동자들은 혁명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노동자들은 힘으로 전체 사회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부유한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폭력행위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한 집단이나 민족 또는 계급이 감당해낼 수 없는 깊은 역사적인 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사실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대치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해는 공산주의가 두 가지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산주의도 교육을 매우 중시한다. 공산주의는 자신들의 처지를 바르게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계급의 실재를 보여주어야 했다. 공산당은 국가와 지배층을 비난하였고, 노동자들로 하여금 강력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할 것을, 그 물결에 그들의 무게를 실을 것을, 그리고 기초와 구조가 흔들리고 있는 자본주의의 건물을 무너뜨리는 날까지 그들의 몸을 던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럴 때라야만, 그리고 파괴가 완성된 후에야,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있는 낙원의 시대가 마침내 인간의 사회적인 질서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말한 시기는 후기 공산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잠정적인 전환의 시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