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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임행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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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자광 / 용인반야선원 2004년 12월 274호
열 살도 채 안 되어서 겪었던 전쟁이라는 국가적 변란과 부모님의 죽음이라는 일대 운명적 사건은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돌아보게 하는 충분한 명제가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암울한 시대에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았던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시작된 인생에 대한 고민은 많은 철학서적들을 들추게 했으며, 그 과정에서 만난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게 하는 가장 수승한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세속적인 부귀영화가 다 갖추어진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고행 끝에 큰 깨달음을 얻어 인류의 구제방편으로 팔만사천법문을 내놓은 부처님의 삶은, 사회에서는 별 희망이 없어 보였던, 그래서 진리 쪽에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던 젊은 날의 내게는 대단한 희망이요 빛이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그 빛을 따라 출가사문의 길로 들어선 것이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 마흔다섯 해 전의 일이니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

친구의 아버지와 함께 가 본 적이 있던 지리산 화엄사로 가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1959년 지리산의 추운 겨울은 아마, 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의 같은 것은 언감생심 생각해볼 수도 없는 가난한 절집 현실에서 숯물을 들여 지어입은 광목 옷을 입고 법당에 서면 뼛속까지 스며들던 한기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게 자급자족으로 이뤄졌던 시절 속에서 나무해 져나르는 부목에다가 산감, 나물 뜯어다 찬을 만드는 채공, 밥짓는 공양주까지 전천후 안 하는 것 없이 골고루 했다. 일하는 데 바빠서 밤이면 곯아떨어지는, 그래서 무슨 재미있는 일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으나 고달픈 일이라곤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 생명발전을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보냈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일하는 틈틈이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외우고 조석예불문과 불공시식을 익히면서 중물을 들여가고 있던, 칠팔 개월쯤 지나서였을 것이다. 당시 화엄사 주지였던 진여스님께서 부르는 것이었다. 진여 스님은 당시 화엄사 주지를 하면서 총무원의 총무국장을 겸하고 있었던 활동적인 젊은 스님이었다.
“임행자, 나를 따라 서울로 가야겠다.”
당시 총무원의 교무부장으로 계셨던 손경산 스님께서 시봉을 할 만한 행자를 물색하시는 걸 보고, 평소 나의 행동거지를 눈여겨보았던 진여 스님께서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내 은사이신 손경산 스님과의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사를 드리고 겨우 올려다 본 우리 스님의 모습은 거룩한 성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언제 어디서나 언행이 점잖으셨던 스님께서 쓸데없는 농담 같은 것을 하시는 것을 돌아가시는 날까지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첫날 스님께 느꼈던 도인의 풍모는 그런 언행에서 연유했던 것이기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청정비구의 표상으로 일컬어졌던 우리 스님을 만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선방에서 공부만 하고 계시던 우리 스님께서 종단의 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사십대 초반이었다. 선방 수좌들의 덕망과 신망을 두루 받았던 까닭에 수좌들의 대표로 뽑혀 교무부장 소임을 거쳐 총무부장, 총무원장을 역임하시는 동안 줄곧 곁에서 모셨으니, 내가 우리 스님에게서 받은 은혜와 가르침은 가이없다 할 것이다.
세속의 때라고는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었던 스님에게서 나는 매일 새벽 예불을 마치고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는 행운을 누렸다. 사미계를 받기까지 7개월 동안 하루 한두 시간씩 스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배웠던 그 시퍼렇게 살아 숨쉬던 가르침은 내가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데 충분한 자양분이 되었고 초석이 되었다. 나는 스님께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며 다시 한번 수행자로 살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고, 이런 도리대로 살아야 사람도 되겠으며, 나아가서는 ‘이대로 하면 부처가 되겠다’는 확신을 했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익히면서 위대한 도인 원효 스님과 만났고 또 우리 스님의 청정비구정신을 뼛속으로 새겼을 것이다.

나의 스승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아랫사람에게조차 말을 놓은 적이 없으셨다. 행자인 나를 부르실 때도 ‘거기 임행자 있어요?’ 하고 부르시곤 했다. 청정비구의 상징이시기도 했지만, 언제나 겸손했고 순진하셨다. 담백하고 꾸밈이 없으신 분이었다.
총무원으로 제방에서 큰스님들이 회의를 하시러 올라오시면 내가 물 심부름을 하곤 했는데, 스님들께서는 나를 보고 ‘똑같네. 경산 스님 숨겨놓았던 아들 왔네…’ 하면서 농담들을 하시곤 했다. 그러면 우리 스님은 화를 내는 듯한 얼굴을 해가지고선 ‘아닙니다’ 하시면서 손을 내졌곤 하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 스님은 원체 말주변이 없으셨고 또 말씀도 많지 않은 분이었다. 불국사 조실이셨던 월산 스님과는 아주 다정하게 지내셨는데, 두 분은 오랜만에 만나서도 웃음을 띤 얼굴로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나 그 묵묵한 무언 속에서 어떤 충만함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우리 스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 월산 스님께서 조사를 하시러 단상에 올라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경산당, 경산당, 경산당!”
단, 이 세 마디 외침뿐이었으니, 평소 두 분이 우정을 나누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얼마전, 열반하신 관응 스님도 총무원에 가끔 올라오셨는데, 언행이 분명, 현명하시고 깔끔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조계사에서 우리 스님을 모시면서 한결같이 뵈었던 모습은 소임을 맡은 스님들께서 모두 나와 마당을 쓰시는 광경이었다. 종정이셨던 동산 스님께서 가끔 올라오시면, 빗자루를 드시고 나와 조계사 경내를 쓰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연하다.
행자시절 때는 물론 그후 우리 스님을 모시면서 동산 스님, 효봉 스님, 청담 스님 등 당시 어른스님들은 다 친견하면서 스님들의 언행을 눈여겨볼 수 있었으니 이도 또한 내가 스승을 잘 만난 덕이었다 할 것이다.

나는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면서, 그리고 우리 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감동으로 바라보면서, 경을 다 마치고는 대논사가 된 다음 선방으로 들어가 언어도단에 이르는 길을 뚫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결심을 실현하지 못했다. 어쩌면 선방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열반하신 나의 스승과 운명이 같았는지도 모른다.
‘이게 내 본분의 모습이 아닌데’ 하시는 소릴 자주 들었다. 늘 바리때를 가지고 다니시면서 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셨으나 나의 스승은 끝내 그 소원을 이루시지 못했다. 조계종단의 기틀을 잡는 시작 단계에서 헌신을 다하시면서 그 복잡한 총무원장 소임의 네 번째 임기중에 열반하셨으니, 아마도 스님은 탐욕에 노예가 된 자들이 너무 괴롭혀서 돌아가셨을 것이다.
나의 스승은 내게 ‘너는 종단에 들락날락하지 말고 선방으로 들어가 수행다운 수행을 해라’ 하셨으면서도, 군포교를 위해 나를 군승으로 가게 하셨다. 그래서 나는 선방 대신 군대에서 군포교로 청춘을 보내고 10년 전, 군승 대령으로 예편하고 다시 산중으로 돌아왔다.
내가 여러 여건을 마다하고 청정비구정신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계행청정과 칼날 같은 비구정신으로 한평생을 사셨던 나의 스승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제자는 스승에 의해 운명을 달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