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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박물관장 도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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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4년 12월 274호
또르르 똑, 또르르 똑…….
본사의 도량석 소리는 주변 암자까지 작지만 선명하게 들려온다.
산천초목이 아직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시간, 33천 구석구석을 깨우는 범종의 울림! 사부대중의 합창 소리가 장엄함으로 미물을 압도한다. 그 여운이 길다.
절마당에는 새벽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금강석을 깔아논 듯 반짝거린다고 했던가.선명하게 드러나는 별자리 모양. 이름을 떠올려 보지만 북두칠성이고 북극성 정도. 카시오페이아니, 오리온이니, 큰곰이니 책에서 배운 겨울의 별자리 이름까지는 생각해 내지만 그것을 하늘에서 찾지 못하니, 해인사에서는 꼭 고개를 들어 새벽하늘을 봐야 한다.

용탑선원 도영 스님은 여행 매니아(?)다. 우리 나라 구석구석 발길 닿지 아니한 곳이 없고, 나라 밖으로는 70여 개국을 돌아왔다. 배낭여행가 한비야가 거쳐간 나라도 그 정도였다고 하니 전문가 수준이다. 1년에 반 이상 스님은 ‘출타중’이다.
스님의 배낭은 언제나 떠날 채비가 돼 있다. 그거 하나 달랑 둘러메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다 돌아오곤 한다. 그래도 사중 어른 스님께는 떠나기 하루 내지 이틀 전 고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스님의 발목을 잡는 일이 많다. 1년 전 용탑선원 주지직을 맡게 되었는데, 한 달 전에는 해인사박물관장이 되었다. 자연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울 수가 없게 됐다.
그런데 어디 있든 잊지 않고 한결같이 행하던 것이 있었는데 예불이었다. 절에 묵을 때는 물론이고 낯선 타국을 떠돌 때도 스님은 가능하면 예불을 거르지 않으려 했다.
빛이 스며들지 않은 새벽, 바로 머리 위로 금강석 같은 별들이 총총히 내려앉은 절마당을 지나 법당에 들어서면 지긋한 눈으로 중생를 바라보시는 자비로운 부처님, 그분을 우러르며 외웠던 초발심의 서원들과 아름답고 장엄한 예불을 스님은 잊지 않았다. 예불은 모진 방황 속에서도 스님을 스님으로 지탱시켜 줄 수 있었던 질긴 끈이었다.
그때 해인사 절마당으로 폭우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던 그 별들을 로마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멕시코 사막에서도 보았다. 그들도 내가 보고 느끼던 별을 보고 산다는 것에 모든 사람들이 새삼 무척 친근하게 다가왔다. 물론 해인사만큼 친숙하고 청명한 별은 어디에서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여행벽의 조짐은 어려서부터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른 시험은 못봐도 세계사나 지리는 늘 90점 이상을 받았다. 중학교 때부터 배낭여행을 꿈꾸었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자주 갈 수 있는 방송국의 앵커나 리포터, 외교관이 되길 바랬다. 만약 그도저도 안 되면 무전여행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마음속으로 스님들을 좋아해 출가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주위에서는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단다.
거칠고 불 같은 성격이었다. 싸움이 빈번했다. 남들도 잘 때리고 그만큼 본인도 많이 맞았다. 스님은 이마의 흉터를 가리키며 그게 다 싸움의 흔적이란다.
“반항적이고 부정적이고 야당적이었어요.”
80년대 중반, 민주화 데모가 한창일 때는 대구, 경북지방의 민통련 지부장을 지내는가 하면 국민운동본부 지부장을 하는 등 사회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불교의 현실에 적응이 안 됐다. 한 사찰에서 1년 있으면 많이 버틴 셈이었다. 절에서 스님을 쫓아내기도 하고 스스로 못 견뎌 나오기를 반복했다. 어떤 해에는 일년에 12번 절을 옮겨다닌 적도 있다. 마음 속에는 늘 불평과 불만투성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도 스님을 그렇게 보는 이 없다. 무던하고 치우치지 않으며 편을 가르지 않는 사람으로 통한다. 해인사 전 주지스님의 임기 4년 동안을 교무국장과 사회국장을 맡으며 임기를 마친 두 스님 가운데(한 분은 주지스님의 상좌였다)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스님의 무던함을 인정하고 있다.
스님을 변화시킨 것은 여행이었다. 누구는 참선수행을 하고 누구는 경전공부가 수행이라지만 도영 스님에게는 여행이 바로 수행이었다.
특히 인도에서 3년 살면서 스님은 크게 달라졌다. 달라이 라마를 만난 것도 큰 기쁨이었고, 라즈니쉬 명상센터에서의 공부도 도움이 됐다. 거기서 스님은 환경에 적응해 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남이, 주변이 나에게 와서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방이 작으면 작은 대로 밥이 입에 맞지 않으면 그런 대로 나를 맞추게 되었어요. 낯선 이국 땅에서 누가 나에게 맞추어줍니까? 내가 가야지.”
성격이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한 달도 못 돼 절을 뛰쳐나가는 일도 없어졌고, 성격 좋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여행은 버리는 과정이다. 버리고 또 버리다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이 텅 비었을 때 거기에 비로소 길이 보이는 것이다.

해인사 소임을 살면서도 스님은 계속 여행을 다녔다. 그래도 쫓겨나지 않은 것을 보면 자신이 무던하다기 보다는 전 주지스님이 무던한 것 같단다.
요즘은 소임이 막중해져 오래 나가 있지는 못해도 일년에 두 번은 나갈 계획이란다. 돌아오는 11월 28일에도 지인들 20여 명과 한 달간 인도를 다녀올 계획이다.
사람들이 한결같이 묻는다. 스님 돈 많아야겠어요? 사실 한때는 여행경비를 벌기 위해 일본에 가서 ‘노가다’를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스님은 실상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혼자서 가는 배낭여행이다. 함께 가면 비용을 줄일 수는 있지만 일정에 맞춰야 하는 번거로움이 싫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잠은 최소한의 경비로 해결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해결하거나 주로 밤차로 이동하면서 차안에서 자는 경우가 대부분.
그래서 비행기 값이 비싸게 드는 유럽이나 남미, 북미에 갈 때는 여행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다. 또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인도에 가는 비용도 여행사와 가면 열흘에 200만원을 넘게 잡지만 스님은 한 달 비용을 그렇게 잡았다. 그것도 용돈까지.
“이번에는 스님들도 있고 나이 든 분들도 있어 좋은 호텔에서도 자고 해서 그렇지, 완전 배낭여행이면 더 줄일 수 있어요.”
여행을 다니다 보면 세계의 변화가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다. 유럽은 변화가 거의 없지만 아시아는 해마다 눈에 띄게 달라짐이 보인단다. 특히 중국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라고.
“성도공항은 환승지역이라 2년에 한 번 꼴로 가게 되는데, 10년 전만 해도 비행기 내리는 곳이 비포장이었어요. 그러다 8년 전에 가보니 아스팔트를 깔았더라고, 3년 전인가에도 들렀는데 슬레이트 지붕이던 공항 청사가 인천공항 수준으로 바뀌었어요. 공항은 그 나라의 수준을 말해줍니다.
인도도 많이 변했어요. 내가 살던 87년만 해도 비닐봉투나 휴지가 없었고 델리 시내에 소와 말이 다녔어요. 내가 나올 때쯤 휴지가 생기더니 지금은 거리가 몰라보게 깨끗해졌어요.”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자연 우리를 비춰보게 된다. 한국불교는 시대의 변화에 앞서갈 수 있는 역량이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안타깝기만 하다. 껍질이 너무 두텁다.
여행 중 이집트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한 라이트쇼를 보면서는 불국사에서 그와 같은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인도 라닥에는 예수가 8년간 수행하다 간 곳을 10년 만에 한 번씩 공개하면서 한 달간 축제를 열기도 하는데 세계각국의 사람들이 그곳을 보려고 몰려든다. 우리의 팔만대장경도 보름 정도의 기간을 정해 놓고 공개하면서 축제를 벌이는 방법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물관장이라는 소임은 안목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잡혀 있어 방향을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은 아직 박물관에 대해 정리가 안 됐다고 솔직히 밝힌다. 생각과 구상은 많지만 현실성 여부가 의문이다. 마찬가지로 생각뿐이다.
주변에서는 기대가 크다. 스님의 시각이 좁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에는 해인사와 역사가 같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독일의 로쉬 수도원과 자매결연을 맺는데 스님이 큰 역할을 했다. 도영 스님은 앞으로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여타의 나라들과도 자매결연을 추진할 생각이다.
자매결연을 맺으면 상대국에 유학생도 파견할 수 있고 유물의 교환기획전도 가능하다. 그런데 그네들이 소극적이다. 팔만대장경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고 관심도 없다. 우리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네들의 평가는 우리와 또 다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해인사박물관이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재정. 내년 예산을 3억원으로 잡았으나 실제 수입은 입장료와 물품판매, 기획전까지 해서 1억원이 채 되지 않는다. 2억원을 해인사가 부담해야 하는데, 해인사 역시 문화사업에 매년 그 정도의 투자를 할 만한 여건이 아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기획전이나 교류전 등에 심혈을 기울일 생각이고 기타 사업도 구상중이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곳을 다니면서 박물관도 무수히 들렀다. 특히 이집트 카이로박물관이나 멕시코의 고고학박물관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곳을 다녀왔지만 스님에게는 자료 사진 한 장 글 한 줄도 남아 있지 않다. 여행에 그런 것들은 짐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그때 좀 챙겨올 걸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도 스님의 머리 속에 그 모습이 빠짐없이 입력돼 나름의 모습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니 차분히 찾아내면 될 일이다.
도영 스님이 해인사박물관의 안정과 변화에 주춧돌이 될 것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