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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외와 종교: 칼 마르크스(Karl Mar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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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뭐꼬 - 법진 / 해인강원 강사 2004년 12월 274호
“마르크스는 인간이 정치, 과학, 예술, 종교를 추구하기 전에 먼저 의식주 해결을 우선시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발견하였다.”(프레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칼 마르크스 무덤 옆에서 연설(Speech at the Grave-side of Karl Marx)》).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독일 사회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 앞서 살펴본 타일러, 프레이저, 프로이드, 뒤르껭 등이 활동하기 전에 이미 그의 삶의 대부분을 살다갔다.
예컨대, 타일러가 1871년에 《원시문화》를 발표하기 전에 그의 모든 주요 저술들이 집필되었고, 마르크스가 죽은 지 12년 후에 프레이저의 《황금가지》가 발표되었으며, 마르크스가 죽은 지 거의 20년이 지나서 프로이드와 뒤르껭 등이 그들의 이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엽에 마르크스의 주요 저술들은 이미 발표되었지만, 그의 생존시에는 주변의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몇몇의 동료들과 공공 기관에서의 사찰 등을 제외하고는 마르크스의 저술과 사상에 주목하는 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경제에 대한 비판적 종합 연구서인 《자본론, Capital, Das Kapital》이 그의 생애 말년에 발표되었는데, 《자본론》의 이론이 발표되자 당시 사상계의 주류들 사이에서 뜨겁게 논의된 바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발표함으로써 유물론자로서 그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러시아에서는 레닌(Vladimir Lenin)이 1917년에 제국 러시아에 종지부를 찍은 러시아혁명(Russian Revolution)을 일으켰고, 194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자 모택동이 가난한 농민군을 이끌고 중무장한 국민당 군대와 힘겨운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세기에 지구 곳곳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자, 유럽과 미국의 지성들은 마르크스에 대해 포괄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공산주의가 사회발전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은 지금도 마르크스를 무시할 수 없는 실정이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두 가지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창시자로서 구체적인 종교의 이론보다는 종교와 유사한 사상의 전체적인 체계를 보여주었다. 지금은 유럽과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패망하여 몇 개의 국가만이 공산주의를 지키고 있지만, 지난 세기에는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마르크스 사상은 세계 도처에서 지배적인 정치철학으로 이용되었다.
경건한 기독교인들에게 성서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과 같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마르크스의 저술들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공산주의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의식들과 성스러운 장소들, 그리고 성스러운 사람들을 규정하고 있다. 공산주의에도 선교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한 세기 내에 무려 몇 억 명에 달하는 개종자를 만들어냈고(지금은 잃고 말았지만),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중세의 종교 전쟁 때보다 더 잔인한 살생을 감행하였다.
사실, 공산주의가 단지 정치, 사회 그리고 종교에 대한 폭넓은 이론을 내놓은 것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자연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를 규정하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예언하는 등 전체적인 체계를 갖고 있다.
둘째로, 마르크스의 철학은 매우 포괄적인 것이어서, 그가 내놓은 종교 이론이라는 것은 그의 전체 사상 가운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다만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많은 저술들 가운데 어떤 것도 종교라는 주제를 갖고 체계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다. 잡다한 저술들과 서간문에서 종교 일반, 교회와 성스러움, 성직자, 종교적인 믿음과 신앙 등에 관해 산발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종교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저술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생애, 활동, 그리고 저술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트리에르(Trier)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태인 변호사의 여덟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 트리에르는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귀족들이 주요 지배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던 프러시아(Prussia)의 통제하에 있었다. 마르크스의 친가와 외가의 모든 할아버지들은 유태교 랍비(rabbi)였으나, 그의 아버지는 프러시아의 반 유태교 법률 때문에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얼마 전에 기독교도로 개종하였다.
마르크스는 지적인 면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고 그리고 평생을 두고 그의 감정을 드러낸 일이 없을 정도로 완고하고 무뚝뚝하며 지독하게 독립심이 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마르크스의 유년시절은 매우 평범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대학교(The University of Bonn)에 진학해서는 1년 동안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였다. 본대학에 있는 동안 술과 논쟁을 즐겨하였는데, 그로 인해 건강을 해쳐 군을 면제받았다.
그후 베를린대학(The Univ. of Berlin)으로 학적을 옮겼는데, 그때까지 마르크스는 매우 불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베를린대학으로 옮기고 난 후에는 매사에 치열한 태도를 지닌 학생으로 변신하였다. 당시 베를린대학은 거대한 도시 베를린 내에 있는 이상적인 배움의 장소로, 학자들이나 정부 관료들, 그리고 뛰어난 지성들이 진보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모여 논쟁하는 장소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당시 독일 지성들은 독일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von Hegel 1770~1831)의 ‘이성’ 철학에 압도되어 있었다.
헤겔이 제기한 이성의 문제는 마르크스의 사상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헤겔은 사상이나 관념 등 정신적인 것들이 세계의 형성에 근본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은 항상 이차적인 것이라고 이해함으로써 마음과 물질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던 이상주의적 성향의 사상가였다.
그가 보기에, 물질적인 요소들은 근원적인 우주의 정신 즉 절대 관념의 육체적인 표현이었다. 독일에서 사상가로 명함을 내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주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마르크스도 젊은 헤겔주의자(the Young Hegelians) 그룹에 참여함으로써 헤겔의 제자들과 헤겔을 비판하는 자들 사이의 논쟁에 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물질과 마음의 문제를 오랫동안 천착해 온 마르크스는 1841년 유물주의적인 경향을 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와 에푸쿠루스(Epucurus)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그는 그 논문에서 세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참인 것은 정신적인 개념에서가 아니라 물질적인 요소에서 찾아진다고 하는 이론을 제기하였다.
이 주장은 마르크스의 후대 사상의 모든 면에 반영되는 철학적인 토대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가 평생 동안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의 명제, 즉 경제적인 현실이 인간의 행위를 결정한다는 확신과 인간의 역사는 계급 갈등의 이야기라는 신념은 그의 박사학위 연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직업적인 대학 교수가 되기를 원했지만, 젊은 헤겔주의자들과의 밀접한 연대 그리고 자신의 급진적인 성향 때문에 교수가 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언론계로 진로를 바꾸어 독일의 정치 신문에 기고하면서 지내다가, 1943년에는 파리로 옮겨 프랑스가 낳은 사회학과 경제학에 정통한 지성들의 저술들을 폭넓게 섭렵하였다.
그리고 브뤼셀(Brussels)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독일로 돌아왔는데, 그후 정치학과 철학에 관한 주요 논문들을 대부분 집필하여 사상가로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예를 들어, 《유태인의 문제에 대하여 On the Jewish Question》 (1843), 《헤겔의 이성 철학의 비판에 대하여: 서론 (Toward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Introduction)》 (1843), 《경제적 그리고 철학적 논고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 (1844), 《성스러운 가문: 또는 모든 비판 가운데 하나의 비판 (The Holy Family: Or a Critique of all Critiques)》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폭넓은 저술들을 통해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그의 지배적인 유물관을 완성하였고, 또한 역사와 사회에 대한, 경제와 정치에 대한, 법과 도덕, 철학, 그리고 종교에 대한 그의 핵심적인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초기 저술은 마르크스의 인생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러한 저술들이 집필되던 시점에 마르크스는 공장 소유주의 아들인 독일 출신 프레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를 만나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다.
엥겔스는 영국에 거주하면서 공장 노동자들의 참담한 삶을 몸소 목격한 바 있었는데, 마르크스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유물론적 경제학과 사회학적 태도를 갖고 있었다.
지성인들 사이에 전례가 없을 정도로 거의 완벽한 공조를 이루어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로 마음을 터놓는 절친한 관계였으나 한편으로는 각기 다른 재능의 소유자들이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보다 깊이 고민하는 사상가였던 반면, 엥겔스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해석가였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확하고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일에 능숙했다.
그들은 함께 공장을 방문하거나 상대방의 연구의 결과를 놓고 서로의 입장을 비판해 주는 등 절친한 도반이었다. 그리하여 1848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동으로 유명한 《공산당선언Communist Manifesto》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들 둘은 어느 누구도 자신만의 견해를 독자적으로 주장할 수 없었던 유물론, 계급투쟁, 공산주의, 그리고 혁명에 관한 견해를 두고 공조했던 것이다.
1848년에 시작된 혁명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자, 마르크스는 곧바로 핵심 용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르크스는 고단한 망명 생활에 들어갔다. 즉, 파리에서 추방당하여 브뤼셀로 갔고, 곧이어 다시 체포되어 벨기에로 추방당하는 등 수차례에 걸쳐 추방당하는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1849년에 마르크스는 유럽 대륙을 떠나 런던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나머지 전 생애를 런던에서 망명자로서 보내야 했다. 가난과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있는 가족들을 살피는 일을 뒤로 미루고 정치와 경제 문제에 대해 끈질기게 집중하였다.
이때 집필한 저술들 가운데 《자본론》도 포함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예리한 통찰력으로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분석하여 정치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구조를 밝혀나갔다.
인간의 경제행위를 왜 유물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유물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과연 혁명적인 공산주의의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고립된 오랜 망명 생활로 인해 마르크스의 말년 10년은 병고의 시간들이었다. 따라서 독서는 계속되었지만 동료들에게 간단한 서신을 보내는 정도의 창작 이외에 본격적인 집필활동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족 생계는 엥겔스로부터 간간이 배달되어 온 원조로 극단적인 궁핍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날 수 있는 정도로 꾸려나갔다. 그의 아내 제니는 1881년에 죽었고, 2년 뒤에 마르크스도 그의 아내를 따라갔다. 그가 살았던, 연구했던,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 30년 동안 저술활동을 했던 런던에 그는 엥겔스와 함께 쓸쓸히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