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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은 요술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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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 이채형 1991년 02월 108호
그날, 장기호의 실패는 오로지 위대한 안경 탓이었다. 안경이란, 누구나 알다시피 어두워진 눈을 밝게 하기 위하여 불편함을 무릅쓰고 눈 앞에다 붙이는 유리조각인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의 안경은 그의 눈을 밝게 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의 눈까지를 밝혀줌으로써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안경을 처음 맞추어 낀 첫날에 일어났다.
장기호는 출판사 교정장이였다. 그는 그 길로 들어선 지 십여 년이 지나는 사이에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눈이 나빠져 있었다. 다시 말해 근시(近視)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별달리 불편을 겪을 정도는 아니어서 여태까지 안경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안경을 낀 사람은 없을테고, 또 그러한 시력을 타고난 사람도 없으리라.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시력의 차이는 있다고 한다면, 장기호야말로 남달리 튼튼한 시력을 점지받고 태어난 편이었다. 대체로 빠르면 유치원생이 되기도 전부터, 늦다고 하더라도 중고생 때 이미 낄 사람은 거지반 안경을 끼게 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인데, 그는 그런 세월을 넘기면서 남들만큼 책도 읽고 공부도 했건만 대학을 마칠 때까지 전혀 시력을 잃지 않아서, 두눈 합쳐 3.0의 시력을 고스란히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출판사 교정장이로 자리를 잡으면서 그 좋던 시력도 조금씩 손상을 입기 시작했다. 쉽사리 느끼지 못할 만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맨 먼저 불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버스의 번호를 멀리서는 알아보지 못해 가까이 올 때까지 분간할 수 없었고, 그러다가 잘못 오르는 경우도 생겼다. 그리고 다방 같은 데 무슨 약속이 있을 때 더욱 심하여, 눈을 잔뜩 가늘게 뜨고 마치 기분나쁜 상대를 째려모듯 이 사람 저 사람을 가까이서 살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물론 이 경우, 다방 특유의 흐린 조명이 주원인이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생면부지의 상대에게 실례이며, 자신도 불편하고 불안한 노릇이었다. 바로 그런 사태를 그날 낮에도 겪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해프닝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심각한 일이었다.
무슨 일로 점심시간에 아내가 사무실 아래 다방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 장기호는 다방으로 내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다방 안은 조금 붐볐는데, 한바퀴 돌아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조금 늦어지나보다 하고, 그는 카운터 앞 빈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낯익은 레지에게 농담까지 한마디 건네고 있는데, 옆자리의 여인이 엽차잔까지 들고 앞에 와서, \"누굴 기다리시는가 본데 합석 좀 하면 어떨까요?\"하고 말을 걸어와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아내였다. 따지자면 나빠진 시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주위력 부족에서 온 실수 쪽에 가까웠으나 어쨌든 쑥스럽고 꺼림칙한 일이었다.
\"아니 그래, 눈이 나빠졌다더니 몇 년을 함께 산 자기 아내까지 못 알아볼 정도예요?\"
아내가 좀 심각한 얼굴로 물었을 때
\" 좀더 아름다운 여자를 기다렸던 모양이지?\"하고 얼버무렸으나, 장기호는 자신의 시력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앞으로 다른 여잘 정말 여편넨 줄 알겠어요.\"
그 순간, 그는 마침내 미루어 오던 안경을 맞춰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아내와 헤어지자 곧바로 회사 가까운 곳의 안경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시력을 검사해 보았더니, 그전에 회사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정기검진으로 눈이 나빠진 것을 알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더 형편없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미루지 않고 안경을 맞췄다. 퇴근 무렵에, 마침 아내와의 약속시간이 조금 남아 있기도 하여, 동료 몇몇과 생맥주 한잔씩을 들게 되었다. 이를테면 마침내 안경잡이의 반열에 낀 데 대한 자축연이었던 셈이다.
\"자, 우리 새로운 또 한 사람의 안경잡이를 위하여!\"
생맥주가 놓이자 누군가 건배를 들었다. 그러자 옆사람이 거들었다.
\"진정한 의미의 교정잡이를 환영하면서!\" 한모금씩 들이켜고 나자 다시 한 동료가 말했다.
\"글쎄, 새로운 안경잡이도 좋고 진정한 교정잡이도 환영하지마, 한 동료의 잃어버린 시력을 두고 건배를 들자니 아무래도 좀 미안하군.\"
이 말에 모두들 잔을 든 채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의 뒤끝이 조금 씁쓰레한 감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장모씨도 교정잡이의 애환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는 점에서 축하할 일이지.\"
마침 자리를 둘러보아 안경을 끼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장기호가 동료들과 헤어져, 아내와 약속한 종로에 내린 것은 저녁 나절이었다. 그는 횡당보도 쪽으로 걸어가면서 안경 낀 눈으로 건너편 공원 쪽을 바라보았다. 아내와 그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다방이 아닌 그곳을 정하면서 아내는 말했었다.
- 훤한 바깥이니 또 못 알아보는 일이야 없겠죠?
그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도 연신 그쪽을 살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아내의 모습을 발견했따. 그는 한순간 안경 맞추기를 제대로 맞추었다고 흐뭇해했다. 막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 화사한 봄날 저녁 나절, 낯선 이들 사이에 낀 채 공원 앞에 서있는 아내의 모습은 어쩐지 한없이 신비로운 느낌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그는 불현듯 아내에 대한 사랑이 세찬 여울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것은 이를테면 일상의 습관에 묻힌 채 무심히 잊혀져 있던 아내에 대한 세로운 개안이었으며, 그에 대한 자성이기도 하였다.
아까는 내가 잠시나마 당신을 못 알아보았다니! 나를 용서해. 그는 갑자기 아내에게 빨리 달려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리고 한순간, 자신이 지금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자기도 모르게 몇 발짝을 내딛다가 끽-- 하는 급브레이크 소리에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은 다음이었다. 그와 함께 무지막지 한 소리가 그의 귀에 뚫었다.
\"이새끼야, 뒈지지 못해 환장했어! 저야 뒈지든 말든 이 새끼가 누구 신세 망치려구!\"
그리고 다시 한마디가 그 뒤를 따랐다.
\"눈알을 네 개나 단 새끼가 빨간불 파란불도 구별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