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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유품 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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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이야기 - 이원섭 1991년 02월 108호
日 화성의 비유
앞에서 설해진 대통결연의 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여겁이래 법화경의 교화르 받아온 몸이라는 것, 바꾸어 말하면 법화경이라는 절대적 진리의 씨는 처음부터 우리들의 마음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고, 그리하여 이 귀중한 씨가 정상적으로 싹터서 훌륭히 자라나 깨달음의 열매를 맺도록, 부처님에 의해 부단하히 보살핌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다시 이런 일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를 설하신니, 이것이 법화칠유주의 네 번째인 ‘화성유’다.
‘비유컨대 오백 유순 험나한 악도惡道, 광막하고 인적 끊겨 소름 오싹 끼치는 곳, 사람많은 이 길로해 보배가 있는 곳을 찾아가려 하여 나섰다 치자 때에 그 인도자 몹시나 슬기로워 험한 길의 뚫리고 막힌 모양 잘 알아서, 여러 사람 이끌고 인도하여 이길 가더니’
이것이 화성유의 서두다. 한마디로 말해서 보배 있는 곳을 향해 험난한 길을 가느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그 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보배있는 곳을 일불승의 비유로 본다면 인도자는 부처님이시요, 길을 떠난 군중은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부처님의 출현에 의해 중생은 자기가 미혹속에서 있는 중생임을 인식하고, 그런 자각이 구도의 행각으로 나서게 했던 것이지만, 그 길은 처음부터 ‘험난한 악도’다.
왜냐하면 계율에 있어서나 선정과 지혜에 있어서나 완전하기를 요구하는 까닭이다. 처음부터 불완전한 것이 사람들인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모든 악을 완전히 끊으며 모든 선을 완전히 실현하겠는가.
그래서 좌절할 수밖에 없기에 사람들은 더는 못가겠다고 하고, 인도자는 “이들이 가엾도다. 어찌 큰 보배 버려두고 돌아가려 함이어뇨”라하여 이들을 딱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방편력을 발휘해 ‘험도중 삼백 유순 지난’곳에 화성을 만들고 이리 말한다.
“너희들은 두려워 말려 돌아가려 하지 말라. 이제 이 큰성에 머물러 무엇이나 뜻대로 할 수 있나니, 저기 들어가면 더없이 편안하며 만약 나아가 보배 있는곳 이르려 한다 해도 거기로부터 떠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성에 들어가서 휴식하면서 모처럼의 안도감에 젖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화성은 무었을 뜻하는가.
화성은 신통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함이 아니건만 중생들에게는 실재하는 듯 여겨지는 성이요, 험악한 길에 지쳐버린 사람들을 휴식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어디까지나 방편의 시설이다. 따라서 이승(二承)을 위해 열반을 이상으로 제시하심이 화성이라 하겠으나, 근기가 열등한 그들이 생사의 고로부터 벗어난 열반을 얻고는 이룰 것을 다 이룬 줄 알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는 글에 명배히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화성이 허구임을 알고 있는 보살의 무리들은 여전히 보배 있는 곳을 향해 길을 가면서, 이러한 성문/연각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 짐작된다. 그러므로 여기까지는 삼승이 대립해 있던 불교계의 양상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충분히 휴식한 것을 확인한 인도자가 화성을 없애버렸다 할 때, 거기에서 부정된 것은 이승만이 아닌 삼승 전부였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그때의 인도자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어서가라. 보배있는 곳 바로 가깝도다. 먼저 있던 큰 성은 내가 신통으로 만든 바이다.너희를 쉬게 하기 위함이니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보배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는 말이 없이 이것으로 비유가 끝나고 있다는 사실이요. 이 발언 중에 보이는 “보내 있는 곳 바로 가깝도다.”라는 말씀이나 어째서 이것들이 그리도 중요한가.
보내 있는 곳이 가깝다는 것은 극락정토를 가리켜 “이에서 멀지 않다”고 하신 말씀과도 유사 하니 이에 멀지 않다 함이 극락이 우리들의 마음에 있음을 이른 말씀인 데 대해, 보배 있는 곳이 가깝다 함은 삼승이 바로 일불승이라는 뜻이니 곧 개권현실의 취지다. 그렇다면 화성을 없앤 뒤에, 왜 사람들을 이끌어 보배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는 말이없는 채 비유가 끝났느냐 하는 의문도 해소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비유는 대통결연과 연결되어 있는 점에서 전생의 석가여래가 교화하시던 양상임에 틀림없으나. 그런 인연과 떼어낸 해석한대도 훌륭히 통할 수 있는 비유임에 틀림업다.

人 수기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부처님의 예언이 수기니, 법설주에서는 사리불에 대한 수기가 있었고, 비설주에서는 사리불에 대한 수기가 있었고, 비설주에서는 수기품 제6에서 가섭을 비롯한 중근의 네 제자에 대한 수기가 행해진 바 있었는데, 이 인연주에서도 오백제자수기품 팔과 수학무학인기품 구를 통해 몇 천의 하근의 제자에게 수기하셨으므로, 화성유품의 해설에 덧붙여 간단히 수기에 대해 언급해 두고자 한다.
법화경에 나타난 수기 중 대표적인 것은, 사리불에 대해 무량겁을 지나 화광여래라는 부처님이 되리라 예언하시고, 가섭은 광명여래, 부루나는 법명여래가 되리라는 예언 따위니, 이 대제자들이 성불의 보증을 받은 것은 개권현실의 도리를 바르게 깨달은 데에 있다. 그리고 이같은 큰 깨달음을 얻은 성자에게 수기하심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가 없으려니와, 수기는 이것에 그치지 않는다. 법사품에서는 다시 법화경의 일구 일계에잠깐 수희하거나 공양만 해도 성불한다 하셨으니, 이것은 깨달음으로부터 기준을 바른 신심으로 옮겨서 수기하신 예라고 하겠다. 그런가하면 방편품의 계송에서는 어린애가 흙으로 불탑 모양을 만들거나, 불상앞에서 다만 한번 합장하든가 손을 한번 들어보여도 성불한다 하셨으니, 이 정도라면 신심이랄 것도 없는 소선에 대한 수기가 될것이다. 또 상불경보살이 만나는 사람마다 예배하면서 “나는 그대를 없신여기지 않으나 그대는 반드시 부처가 될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하여 그런말을 들은 사람 쪽에서 자기를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 욕하거나 돌맹이 따위를 집어던지면, 몸을 피해 멀리가서 다시 그같은 말을 다시 외쳤다는 것인데, 이쯤되면 일제중생에 대한 수기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한 일이 있는 데바닷다 같은 악인에 대한 수기도 있어고, 다시 일곱 살 먹은 용녀가 눈앞에서 성불하는 장면까지 벌어졌으니, 이것은 축생의 성불을 인정하심이 될 것이다.이는 때에 따라 기준을 달리하면서 수기하기는 했어도, 결국은 모든 중생에게 성불하리라는 보증을 주신 것이 되는데, 그 근거를 보이신 것이 오백제자수기품에 나오는 계주유다.
한 사람이 큰 부호인 친구를 방문하여 술에 취해잠이 들었는데, 주인은 볼 일이 있어 외출하면서 그 사람의 옷 안에 굉장히 비싼 값이 나가는 구슬을 달아 주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은 술에서 깨자 다시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을 계속하다가 이를 본 친구가 그 구슬의 소재를 일깨워줌에 미쳐서야 그것을 팔아 부유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에서, 가난한 사람을 우리들 중생이라고 보면 부자인 친구는 부처님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무명의 술에 취해 잠에 빠져 있는 중생에게 부처님은 법화경의 인연을 숨겨 주심이 옷 안에 달아 놓은 구슬이요, 그런 인연과 얽혀 있는 줄도 모르고 미혹 속에 떨어여 있다가 그 같은 결연을 일깨워 주심에 미쳐서야, 올바른 불도를 청취하기에 이른다는 취지일 것이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소급해 올라갈 때에 구슬이 대통결연이 되는 것이어서, 구슬의 정체는 기실 우리들이 지닌 불성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이 불성이 모든 중생에게 수기가 행해진 근거였다 해도 된다.
한마디로 말해 불교는 부처가 되는 가르침이고, 유달리 이런 점을 강조한 것이 법화경이라 할 때 법화경을 기회 있을 때마다 수기하신 것은 당연하니, 수기는 법화경의 결론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