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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별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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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도경 1991년 02월 108호
나무는 이파리를 다 땅으로 되돌려 보내고 맨몸으로 서있다. 겨울의 늦은 밤, 초승달은 일찍 서녘으로 넘어가고 별만이 가득히 빛을 내리붓고 있다. 이 고요한 밤하늘을 가르며 들리는 죽비소리. 푸른빛이 발하는 승가의 살아 있는 눈이다. 단순한 격자창을 사이로 하여 비치는 결가부좌한 스님의 뒤모습에서 칼날 같은 자기추구를 본다. 밤에서 낮을 이어주는 큰방의 불빛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이끌어주는 희망의 상징이다.
모든 것은 허망하여 집착할 것이 없으며, 태어나서 병들고 늙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나, 나고 죽는 일이 없는 무위열반(爲涅槃)을 구하여 부처님께서는 출가를 하셨다. 출가후 부처님은 당대의 유명한 여섯 명의 고행자에게 수학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몸과 마음의 고행이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부처님은 육사외도(六邪外道)를 떠나셨다. 보리수 아래에서 ‘내가 만일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라는 서원을 세우고 좌정하셨다. 마음과 육체의 사슬에 비유되는 마왕 파순의 집요한 방해를 꺽고 드디어 12월 8일 새벽 밝은 별을 보시고 성불을 하셨다. 성도하신 후에 40여 년간을 한결같이 미몽에 빠진 중생들을 위하여 법륜을 전하셨다.
이렇게 법륜이 전하여진 인도는 크게 우기와 건기로 나뉘어진다. 건기는 비도 내리지 않고 그다지 춥지도 않아서 유행하며 교화하기가 쉽다. 그러나 우기는 많은 비와함께 더위가 매우 심하여 돌아다니며 탁발을 하거나 교화라기가 힘들다. 이 우기 3개월간을 정사에 안거하면서 수행정진하게 되었다. 이것이 하안거이다. 이 하안거는 티벳/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지역적 문화적 여건에 맞게 동안거가 실시되었다. 이동안거 가운데쯤에 불처님의 성도재일이 있다.
이 성도재일을 기한으로 12월 2일부터 12월 8일까지 일주야를 장좌불와(張坐不臥)하며 정진한다. 이것이 현재 승가의 좁은 범위의 용맹정진이다.
범부중생은 비롯함 없는 그 어느 때부터 망견(望見)에 집착하여 지관의 힘이 적기 때문에 미세한 무명과 번뇌를 끊기가 어렵다. 그래서 수행함에 있어서 쉽게 물러나려는 생각을 낸다. 이 퇴굴심에 세 가지고 있다.
첫째, 무상정등정각의 보리는 광대하고 심원하다는 말을 듣고는 도저히 자신은 깨달음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여 퇴굴심을 내게 된다.
둘째, 보시 등 모든 수행을 다 닦기가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은 참으로 청정수행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고 퇴굴심을 내게 된다.
셋째, 모든 부처님들께서 증득한 불과를 깨닫기가 눈이 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나무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말을 듣고 퇴굴심을 내게 된다.
이런한 세 가지의 퇴굴심이 일어날 때에 세가지 방법으로 대치하여 마음을 굳건히 하는 것이 용맹정진이다.
첫째, 이미 제불께서 커다란 깨달음ㅇ르 얻으셔서 부처님을 이루셨으니 나도 또한 부처님처럼 성불 할 수 있다는라고 믿으며 자신을 책려하는 것이다.
둘째, 자기자신의 수행을 부처님의 인행에 견주어, 부처님께서는 저렇게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하셨는데, 나도 그렇게 열심히 수행해야지 하며 자신을 독려하여 수행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이다.
셋째, 이와같이 수승한 인연으로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 수행하는 데 어찌 퇴굴심을 내느가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게으르지 못하게 하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위의 세가지 방법으로 퇴굴심을 막고 수행하여 대오각성을 이룬 후에 삼업을 잘 닦아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용맹정진의 참뜻이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욕망에 얽매인 중생들을 교화하시는데 일생을 보내셨듯이 현대의 승가는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엇 현대사회의 아픔과 병폐를 제거하는 중화제가 되어야 한다.
현대는 서구의 인본주의라는 미명아래 인간만을 위하여 발전하여 왔다. 특히 소수의 기득권국과 사람들의 추한 이기심을 채우기 위하여 무분별하면서도 기형적으로 성장하였다.
물질과 금전만능의 효용을 위해서 자연은 인간에 의하여 정복되고 활용되어야 할 단순한 대상물로 전락했다. 이렇게 취급된 자연은 인간의 물질적 욕구충족의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물질은 임시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에 분제는 만들었지만 문제 해결의 능력이 없다. 이런한 문제해결을 위하여 수많은 안건이 제시되었지만 이간의 사고를 바꾸지 않은 한 불가능한 것이다. 이 생각을 바꾸는 기틀을 마련해 주는 사람들이 승려이다. 이것이 승가의 사명이자 목적이다.
전환의 진리를 찾아 전진하는 구도자는 고독한 나그네다. 먼저 진리를 찾기위해 눈과귀로 비롯한 모든 감각기관을 자신의 내부로 기울인다. 여기에서 인간의 가능성은 여실히 나타난다. 인간의 가능성은 화엄경처럼 인간의 상상력이 미치는 모든 범위의 화장세계 꾸밈보다 더 화려하게 장어될 수도 있다. 또한 한줌의 바람이나 티끌 하나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확실한 전환인 성불의 가능성은 언제나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궁극목적인 견성성불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다.
‘태어난 인간은 누구든지 죽는다’라는 숙현한 명제가 변함없듯이 부처님의 깨달음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시대나 상황에 관계없이 동일하다.
다만 깨달음에 대한 표현방법, 명칭, 설명과정이 시대/지역/민족적 특성 및 개인의 개성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와같이 지역과 시대에 알맞게 불교는 수용의 자세를 바꾸어 민중을 계몽하고 지도하여 깨달음으로 이끌어 왔다. 이것이 현재와 같은 각국의 상이한 교단성립의 원인이다.
한 시대나 지역에 맞게 특수한 상황에서 보편적 진실인 부처님의 깨달음은 시공을 벗어나서 이루어질수 있다. 그러므로 매년 하는 의례적인 행사가 아니라 참으로 절박한 마음과 합치되려는 격렬한 수행을 뒷받침으로 한발 한발 대오각성에 나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 수행의 원칙이다. 철저한 도덕적 수행은 그다지 학문과 관계가 없다. 학문이나 배움이 보잘거없더라도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실천이 없는 수행은 무용지물이다. 참다운 교법을 배워서 말고 같이 행하여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 상응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크게는 불종으로 하여금 끊어지지 않게 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자리아타행을 더욱 닦아야한다. 작게는 불자로서 승려로서 자질을 갖추어 얼룩지고 일그러진 이 미래를 바로잡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승가느 치열하게 용맹정진을 할 때이다.
얼어 붙었던 땅이 녹고 날씨가 풀리면 굳게 문을 닫았던 씨앗들이 싹을 틔우는 봄이 올 것이다. 봄이 오는것처럼 큰방의 불빛은 산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정수리를 스치는 바람 속에 봄이 가득히 담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