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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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효림
1991년 02월 108호
차가운 이 겨울 설한풍이 몰아치는 엄동에 선각들은 산사에서 가장 맹렬한 자기와의 전쟁을 한다. 보통 용맹정진이라고 하면 하안거와 동안거중에 각7일씩 한시적 시간을 정해 놓고 잠을 자는 자리에 눕는 것이 일체 없고, 개인적 자유시간을 가질 수 없게 엄격한 청규를 정하고 하는 참선공부를 일러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의례적인 관습으로 치루어지는 행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발심하여 출가한 사문에게는 발심한 그날이 결제요, 결제가 바로 용맹정진이기 때문이다. 용맹정진하는 공부는 끝나는 날도 없다는 말이다. 여기는 잠시의 쉼도 허용할 수 없고 방학이나 휴일이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밥먹고 똥누고 빨래하고 세수하고 온갖 생활 잡사 일거수일투족이 공부이며 설사 잠자리에 들어서 두 다리를 쭉 펴고 잠이 든 시각이라 하더라도 공부에의 긴장을 늦추는 것이 용납될 수 없다. 공부의 요긴한 대목은 간단없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길에 들어선 사람은 자신의 목숨이 자기의 목숨이 아니다. 옛날 통도사 극락암 경봉노스님은 ‘고부인은 한세상 안 태어난 셈치자’라고 하셨다. 죽은 목숨으로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납월 팔이 첫새벽 하늘에 반짝이는 샛별에 눈 맞추는 부처님의 소식을 확철하게 깨달아 아는 날 새로 태어나는 것이며 용맹정진, 회향학는 날이고 해제하는 날이다. 비로소 공부가 끝나고 무애자재한 대해탈인이요, 대자유인이 되어 생사를 결단내고 일대사를 해마친 것이다.
내 경험으로 용맹정진은 참으로 용맹한 장부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극한적인 한계점을 뛰어넘는 인내와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경험있는 구참 남자일수록 어려워하고 초학자는 멋모르고 겁 없이 덤비는 것이 용맹정진이다.
70년대 초 계축년이던가 해인사 조사전에는 혜암 큰스님을 모시고 수좌 일곱 명이 한 칠 90일을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나 역시 말석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초학납자로서 겁 없이 덤빈것이다.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굳게 쥐어 결심을 다졌다. 이번철에 죽을을 각오하고 기필코 생사르 끊고 확철대오를 하여 일대사를 해 마치고야 말겠다는 각오였다. 일곱명 모두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며 모두들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시작할 때의 굳은 결심과 각오와는 달리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 보름이 지나면서 모두들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루 24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알수 없었다. 오직 매시간 매시간이 견디기 힘들고 당장에 그만두고 도중하차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잠간 , 한 시간, 아니 30분, 아니 단 오분만이라도 어딘가에서 어리를 펴고 눕거나 잠을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모두들 그 누구도 용맹정진 시작할 때 한 굳은 결심과 자기와의 철저한 약속을 깨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혜암스님이 한치의 양보가 없으셨다. 처음 며칠간은 젊은 남자들인 우리가 앉은 자세로 보나 형형한 눈빛과 혈기가 자못 용맹스러웠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우리는 지치기 시작했고 몸에 기가 쇠진해지고 어께에 천근 무게를 올려 놓은 듯한 어깨결림을 못견뎌 온몸을 비비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혜암스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이었다. 아니 갈수록 무너지려는 우리들의 신심(身心)을 장군죽비로 다그치고 계셨다.
좌선중에 잠깐 졸아보는 맛은 참선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혜암스님은 잠간 졸아보는 것조차 용납하시지 않으셨다. 혜암스님을 중심으로 일곱 수좌가 원을 그리고 대좌를 하고 있는데 혜암스님과의 거리는 불과 장군죽비를 들고 손을 뻗쳐 어깨를 내리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다. 하여 우리가 조금만 졸아도 혜암스님은 당신 옆에 두고 있던 장군죽를 들고 사정없이 어깨를 내리치시는 것이다.
장군죽비에서 나는 팡!팡! 하는 소리가 고요한 산사의 밤을 깨우고 있었다. 한 사람이 장군죽비를 맞은면 나머지 대중도 잠이 한꺼번에 달아났다. 그야말로 선실 안은 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맴돌고 각기 화두 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몰려오는 졸음과 처절한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한 달이 지나면서 다리 아픔과 어깨 아픔은 어느정도 조복이 되는 듯했는데 모두들 기운이 탈진되어 앉으면 허리가 꼬부라지고 머리가 천근 무게로 아래로만 처졌다. 그러다 보니 큰방에서 대중공양시간에도 고개를 쳐박고 졸다가 강원 학인스님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정랑에서 똥누다가도 쪼그려 않은 채로 조은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랑에 갈 때도 신고를 하고 가기도 했으며 십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을 때는 정랑으로 찾아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반결제 날짜가 지나서였다. 밤 열 두시에 졸음르 쫓기 위해서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었다. 한번은 차를 달이기 위해서 부엌에 나간 스님이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찾아 나갔더니 부엌 아궁이 팡엣 졸다가 그만 잠이 깜박 들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아궁이에 피운 불이 따뜻하니 얼마나 잠이 잘 왔겠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내가 나가 보니 스님의 누더기 옷에 불이 붙어 타고 있지 않는가. 옷타는 냄새와 연기가 부엌에 가득했다. 그래도 이 스님은 모르고 자고 있다. 급히 불을 끄고 스님을 깨웠다. 다행히 몸에 화상은 없었지만 아끼는 누더기 한자락이 타고 말았다. 방안에 들어오자 혜암스님의 불호령이 대단했다. 수좌가, 그것도 용맹정진하는 공부인이 옷이 타는 줄도 모르고 졸았다는 것은 화두를 놓쳤기 때문이며, 화두를 놓치고 무슨 공부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미 죽은 송장이나 자격이 없다. 그러니 당장 선열당이나 퇴설당으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해인사는 그 당시 선원은 선열당은 보통정진, 퇴설당은 가행정진, 조사전은 용맹정진으로 나위어 있었다. 그러니 용맹정진에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은 선열당으로 내려가라는 말씀이시다. 그래서 이 스님은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고 참회를 하고서야 겨우 용서를 받았다.
또 한번은 스님 한분이 누더기 속에 누비조끼를 껴입고 앉아서 졸고 있었다. 혜암스님의 죽비가 즉시 그 스님의 어깨에 떨어졌다. 드래도 이 스님은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조는 것이다. 물론 이 스님은 졸고 있지 않았다. 다만 너무 힘들어 속에다 두툼한 조끼를 껴입고 죽비를 맞아도 아프지 않도록 준비를 하고 버텨보는 것이다. 일종의 항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릿발 같은 혜암스님이 이런 사정을 봐 주실리 없다. 누더기 자락을 들치고 넓적다를 때리셨다. 깜짝 놀란 이 스님이 벌떡 일어나자 혜암스님도 따라 일어나 “이놈 퇴굴심을 내어서는 안되는니라”하는 일갈과 함께 다시 장군죽비를 높이 쳐들고 머리통을 한대 갈기겠다는 기세이다. 그러자 이 스님은 “아이구나! 날 살려라”하고 도망을 가고 혜암스님은 다시“이놈! 이놈!....”소리를 연발하시면서 따라가고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깊어가는 산사의 겨울밤 간간히 들리는 바람소리 한없이 고요한 가야산 골짝은 이렇게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퍼런 날을 세우고 생사와 대적하면서 싸우는 치열한 전쟁터이며 반야검 취모검을 갈고 있는 도량인 것이다.
납월 팔일 용맹정진 때였다. 납월 초하룻날 입제를 하고 8일날 회향을 하게 되어 있다. 이때는 선원 전체 대중과 강원 학인스님들 중에서도 희망자는 특별히 입장을 하여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선열당 큰 방에서 정진을 하는데 우리 조사전 대중도 7일 동안은 같이 동참하기로 했다.
7~80명 대중이 혜암스님 한 분만을 할 때보다 대중적인 분위기라는 것이 있었다. 시간이 덜 지루하고 장중한 맛이 있었다. 방장스님도 수시로 큰방에 오셔서 경책을 하시기도 했다. 특히 방장스님의 경책은 엄하기로 유명하다. 식후 한두시간이 가장 졸음이 많이 오는 시간인데 이때 방장스님의 발자국 소리가 문밖에서 들리면 대중들은 바짝 긴장하여 잠이 다 달아난다. 그래도 방장스님은 문을 썩 열고 방나에 들어오시면 조금만 조는 듯이 보이는 사람에게 사정없이 장군죽비를 내리치시는 것이다.
하루는 밤 열두 시의 잔죽 공양시간이었다. 잣죽공양은 밤 자정에 잠시 피곤한 몸의 긴장을 풀고 쇠진한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서 묽게 쑨 잣죽을 가볍게 한공기 먹고 큰스님의 소참법문을 듣기도 하는 그런 시간이다. 나는 피곤한 몸에 졸음을 쫒겠다고 문밖에 나와 찬바람을 쏜다는 것이 그만 마루끝에 쪼그려 앉아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모이 공중에 붕~~ 뜨더니 한없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그러더니 꽝!하고 정신이 번쩍 드는데 마루끝에서 축대 아래 마당으로 떨어져 있었다. 높이가 어깨 높이만큼이나 되는데 다행히 크게 다친곳은 없고 이마가 약간 벗겨져서 피가 조금 나왔다.
그깨 얼마나 놀랐는지 잠은 십만팔천리나 달아나고 등줄기에 진땀이 흐르더니 잠시 후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상쾌해지고 정신이 밝아졌다. 그후 해제일까지는 정진이 힘든 줄 모르고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오래전 일이다. 그동안 많은 새월이 흐른 것이다. 혜암 큰스님도 벌써 세수가 칠십을 바라보시는 노스님이 되셨다. 그때 같이 공부하던 도반들도 사십대의 나이가 되었다. 무상한 세월 한번 왔다 가느 인생 노인불수 파거불행이라는 옛 고인의 말씀이 귀에 남는다.
공부란 시기가 있는 것이다. 출가사문의 삶이란 어떤 곳에 있든지 일생 동안 불도수행의 길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젊어서 혈기왕성하고 순박하여 마음에 때가 덜 묻어 있을 때 해야하는 것이다.
방장스님은 항상 공부에 있어서 몽중일여 오매일여를 말씀하셨다. 마땅히 대용맹심으로 공부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경계에 끄달려 가지 않는 타성일편으로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공부에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중도에 그만 둘수 있으며, 물러서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몰려오는 졸음을 쫒기 위해 허벅지 깊은 살에 송곳을 꽂고 하루해가 지나면 두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 옛 조사님의 말씀은 바로 내가 해야 할 수행의 자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