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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 경허(鏡虛)선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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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1년 02월 108호
경허스님의 만년(晩年)의 삶을 조명해 볼 때 나라의 안위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던 망국의 시기였던 참담한 시대적인 배경을 설령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스님의 삶은 너무나 쓸쓸하고 적막하다. 일세(一世)를 풍미했던 대 선지식(善知識)으로서 호호탕탕(浩浩蕩蕩)하고 거침없었던 무애도인의 풍모는 접어두고라도 서산대사 이후 겨우 명맥만 이어오던 선맥(禪脈)마저 끊어진 선불교의 수행가풍을 새롭게 일으킨 중흥조(中興祖)로 불교사적 의미가 재평가되어야 하는 견지에서도 스님의 후반 인생은 너무나 기구하고 엉뚱하다. 산이 크면 그늘도 크게 드리우듯이 경허선사에게는 근대 고승 가운데에서도 유별나게 전설처럼 회자(膾炙)되는 많은 일화들이 있어서 그것을 여기에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지만, 스님의 기행(奇行)과 무애(無碍)행의 편모는 이미 선가에서는 고전(古典)이 되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후반의 스님의 삶 또한 그토록 많았던 스님의 무애행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된다. 그러면 여기서 스님의 만년의 행장(行狀)을 살펴 보기로 하자. 전호(前號)에서 밝힌 대로 오십대 초반에는 해인사를 비롯하여 동래 범어사 등지에서 납자를 제접 하거나 불사에 동참하는 등 대중교화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스님의 세수 56세 때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있었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법회에서 법문을 하였으며 금강산을 거쳐 안변 석왕사에서 있었던 오백나한전 개분불사(改粉佛事)에 증명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스님의 산문 내(內)에서의 행장은 끝이 난다.
그 후 스님의 만행(萬行)은 세속에서의 동사섭(同事攝)으로 이어져 구름처럼 물처럼 자유롭게 떠돌다가 한반도 맨북단 삼수(三水)갑산, 장진을 비롯한 관서지방과 관북 일대를 만행하는 한편 국경을 넘어 만주지방까지 소요자재 하였다. 이 때 산문을 벗어난 스님의 차림은 굳이 승이랄 것도 속이랄 것도 없는 자연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미 스님은 경허라는 법호도 스스로 버리고 선비 박난주(朴蘭州)라고 자처하였으며 강계군 종남면 한전동 담여(淡如) 김탁(金鐸)의 집에 머물며 인근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노릇으로 일생을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이 때의 스님의 삶은 철저한 은자(隱者)의 삶이었다. 떠돌이의 삶과 평소에 그렇게도 좋아했던 술과 시(詩), 스님의 글씨와 선시(禪詩)는 이미 탈속하고 주옥같았다. 스님의 나이 64세 되던 4월 25일, 스님은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다음과 같은 임종 계를 남기고 홀연히 열반에 들었다.
心月孤圓 光呑萬象 光境俱忘 復是何物
마음 달은 홀로 둥 글도다 만상과 빛이 하나가 되고 빛과 경계 모두 잊었는데 이 또한 물건인고. 스님의 삶은 철저한 무소유 대자재의 삶이었다. 이미 그에게 주어졌던 법주(法主)의 자리도, 한 시대를 주름잡던 대종장(大宗匠)의 칭호도, 그를 얽어매던 승가 내의 어떤 형식도 벗어버렸던 그의 말년의 삶은 인간 본연의 삶으로 회귀함으로써 저 멀리 서라벌의 법왕 원효대사의 무애자재와 버금가는 대 자유인의 삶을 펼쳤던 것이다. 가끔 오늘날의 시각에서 스님의 만행이 그 당시 그렇게 온 민족이 당하고 있었던 외세의 침략과 혼란, 민중의 비극에 동참함이 없이 개인적 만행 공간에서 끝나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회사적 제(諸)문제와 함께 개인적인 기질에 기인(基因)하였다고 보여 진다. 스님의 만년의 삶에 대해서는 이만 생략하고 여기에서 스님의 사상과 남겨진 저술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온 법맥은 부용 영관, 벽계 정심, 서산, 사명, 소요, 청매 대사 등에서 선양되었던 간화선(看話禪)의 그 선적 전통이 사라져 버리고 통불교적인 성격으로 다만 선(禪)이라면 구두선(口頭禪)으로만 지탱되어 오던 불교에 새롭게 간화선의 가풍을 정립하고 개오견성(開悟見成)을 표방하는 실참실구(實參實究)의 선풍이 경허스님에게서 재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화두선의 전통을 오늘에도 이어가는 데에는 경허스님의 영향을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스님의 간화선의 중흥과 함께 이야기되어야 할 것은 결사(結社)운동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미 전호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해인사에서 행했던 결사운동 말고도 여러 차례의 결사를 행한 바 있다. 그런데 경허스님의 결사운동은 단순한 선불교 결사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참선을 원칙적으로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선 수행만을 내세우는 편견을 지향하여 보다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선수행의 상징적인 편모로 목우사상(木牛思想)에 대한 선양이다. 오늘날 종파에 관계없이 많은 사원의 벽화로 등장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십우도(十牛圖)를 비롯한 목우(木牛)에 관한 그림인데 이 때 목우란 오랜 동안 선가(禪家)에서 선수행의 단계를 소를 길들이는 것과 비유해서 그려온 불교그림의 일종이다. 이러한 십우도나 목우도가 불교 내에 파급된 것은 중국 구송대 이후 선이 보편화된 이후 관념적인 시문(詩文)과 함께 제작되어졌지만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기는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림과 함께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로 대표적인 것이 곽암(廓庵)화상의 십우도 송과 보명(普明)화상의 목우도송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목우 사상에 대한 선양은 곧 스님의 시에서도 나타나는데 스님의 심우송(尋牛頌).심우가(尋牛歌) 심우도법문 등의 시문이다. 특히 십우도 시문 중에서도 ‘가소기우자, 기우갱멱우(可笑騎牛子,騎牛更覓牛)’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하면서 자성(自性)그 자체가 곧 부처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목우사상의 선양은 여러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지만 특히 대중교화를 보다 효과적이고 친근하게 하려 한 스님의 자비와 실천의 원력방편임을 알 수 있는 한 단면이다. 그리고 스님이 남긴 저술이다. 사실 스님이 남긴 글들은 학문적인 업적이나 대작은 아니다. 오늘날 흔히 경허스님의 문도들에 의해 제작된「경허집(鏡虛集)」에는 상당법어(上堂法語), 서문, 기문(記文), 서간문, 행장, 찬문(讚文), 시문, 가(歌)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우리말로 된 ‘중노릇 하는 법’이나 ‘법문곡(法問曲)’과 같은 그의 시는 서산대사. 소요대사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절창이라 할만하다. 끝으로 스님의 시 한편으로써 이 보잘 것 없는 글을 맺을까 한다. 시 중에 경허대사에 대한 글이 많이 나와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일람하길 기대한다.
山與人無語 雲복鳥共飛 水流化登處 淡淡慾忘歸
사람은 산을 대해 말이 없고 새는 구름 따라 함께 난다
물 흐르고 꽃 핀 곳에 우두커니 서서 돌아갈 줄 모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