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춘스님을 만나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애를 태웠다. 해인사로 찾아가려는 기자에게 ‘지금은 용맹정진중이니 서울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고 내내 기다렸는데, 마침 오시기로 한 전날부터 온종일 눈발이 날리고 기온이 뚝 떨어져 못오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 연일 심한 독감으로인해 몸이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대중들과 함께 용맹정진을 마치시고 기자와의 약속을 지켜주셨다. 스님을 만나기 위해 조계사 옆에 위치한 전국 비구니회 사무실을 찾았다. 스님께서는 만나자마자 대뜸 사무실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할 만큼 커다란 서울시 전도에 빨갛게 색칠한 부분을 가리키면서 비구니회관 건립부지로 예정된 곳이라고 일러주시면서, “나는 그동안 바랑 지고 참선만 하러 다녀서 아는 것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이런 중책을 맡아 내 나름대로는 애를 쓴다고 하는데도 일의 진척이 늦어서 죄송한 생각뿐이지요. 그렇지만 원력을 세워 열심히 하면 비구니회관은 건립될 거라고 믿어요. 비구니회관을 건립하여 비구니들의 성품을 단속하고, 행자가 되려고 오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교육도 시키고, 고뇌에 싸인 중생 가운데서 비구니회에 의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법문도 들려주고 해서 모든 고뇌를 씻어주고 싶은 것이 전국 비구니회의 소망이에요. 벌써 비구니회관 건립의 원력을 세운 지도6년이 되었어요. 한 임기 끝나고 회장직을 내놓아야 하는데 자의반 타의반 해서 연임을 하게 되었어요. 오는 오월이면 만기가 되는데 그 안에 부지를 매입해야지 하면서 혼자 냉가슴만 앓고 있어요 ”하신다. 스님의 그 말씀이 너무 간절하여 스님의 요즈음 생각이 오매불망 전국 비구니회 회관건립에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스님께서는 현재 전국 비구니회 회장직을 맡고 계시는데 전국 비구니회의 당면 과제는 스님의 말씀처럼 회관건립이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한 달 중 삼분의 이 이상을, 어떤 때는 한 달 내내 서울에서 지내신다. 연로하신대도 불구하고 일 주일에 한 번씩 임원회의를 주관하고 회관 부지를 매입하는 일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실무적인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시다. “전국 비구니가 줄잡아 4천~5천 명은 되고, 지방 조직까지 다 잘되어 있으니 덩치가 작다고는 할 수 없어요. 어서 빨리 비구니회관을 건립하여 교육도 시키고, 법문도 듣고, 수행도 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내 자신이 무능하여 이 일을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책할 때가 많아요. 그래도 열심히 하면 꼭 이뤄지리라 믿어요.” 요즈음 스님의 소원은 첫째도 비구니회관 건립이요, 둘째도 비구니회관 건립이다. 그래서 스님께 회관 건립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지을 것인지 그 내용에 관하여 질문을 드렸더니, “첫째는 만불전을 지어서 기도도량으로 만들고, 둘째는 행자원을 만들어 승려가 되려고 오는 사람들에게 보다 체계적인 단체교육을 통하여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도록 하고, 셋째는 기존 승려들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전문교육을 시킬 예정이며, 그 나머지는 불교신자들의 포교활동과 꽂꽂이, 다도 등 여가선용을 통하여 인간적인 소양을 윤택하게 함이 목적이에요”라고 말씀하신다. 현재 비구니회관 건립부지로 내정된 곳은 수서지구에 약 2,200여 평이다. 서울시에서 오는 삼월까지 건축허가를 해주겠다고 하여 그 약속을 믿고 그날 만 손꼽아 기다리신다고 하신다. 스님께서는 그 일이 꼭 이뤄지리라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말씀 도중에도 내내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비구니회관이 빨리 건립되어 비구니회가 초지일관하여 목적을 달성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신다. 혜춘 스님께서는 1919년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아버님께서 변호사였던 관계로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그 당시만 하여도 굉장히 들어가기 어려운 일본 학교를 다녔다. 여학교시절부터 음악을 듣고 노래 부르기를 너무나 좋아하였고, 감정이 풍부해서 직설적이고 자기표현이 솔직한 성격이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때때로 웬지 모르게 세상이 슬프고 천지간에 혼자인 것 같은 절망적인 고독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22세 때에 단신 월남하여, 32세 때에 6.25사변이 터져 세상이 허망함을 느꼈다. 스님께 출가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은 자운(慈雲)스님의 「범망경」 법문을 통해서이다. “절집과는 출가 전부터 인연이 좀 있었는데 우연히 「법망경」법문을 듣고 발심하게 되었어요. 「법망경」 서문에 보면, ‘시간이 바른 것은 달아나는 말과 같고, 생명이 급한 것은 산 위에서 물을 붓는 것과 같으며 졸아드는 물속에 있는 고기와 같다’는 말씀이 있어요. 그런 법문을 들으니 부처님의 그 말씀이 꼭 내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또 세상살이가 너무 부질없는 것 같아 중 노룻 밖에는 다른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다른 갈등이 없이 곧바로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어요.” 스님께서는 6.25 때 인홍(仁弘)스님께서 총림을 세운 창원 성주사에서 창호(彰浩)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해인사에서 인곡(麟谷)스님께 사미니계를 받았다. 스님께서는 올해로 세수가 73세, 법랍은 40년이 된다. 스님께서는 그 긴 세월 동안 참선 공부만 했다고 하시며, 처음 발심했을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도 그렇지만 처음 중노릇 할 때는 중노릇이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 헛 세상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좋은 중노릇을 왜 진작 하지 않았나 싶었어요. 은사스님께서는 그저 참선 공부가 중노릇의 최고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그래서 밤납 화두(話頭)만 챙겨 들고 참선 공부만 했어요. 지금도 초등학교 때 배운 것을 다 기억할 만큼 정신집중이 잘 되어 중노릇이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그런 것을 보니까 나는 전생부터 중노릇을 했던 사람인데 전세(前世)의 업(業)의 업(業)으로 인해서 늦게 출가한 것 같아요.” 스님께서는 현재 자신의 모습을 생사발심(生死發心)을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하시며, 수행자는 그저 딘실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하신다. “참선만 열심히 해도 생사발심을 못하면 견성성불이 늦어요.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도 한순간에 불과해요. 숨을 내쉬면 산 것이고, 숨을 들이키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이처럼 생사가 급한데 그런 생사발심이 없이는 공부를 해도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아요.” 스님께서는 그동안 절집에 들어와 윤필암.부도암.내원사.범어사.대승암.석남사 등 전국적으로 비구니 선원이 있는 곳애는 안간 곳이 없을 만큼 수행 정진에 힘썼다. 그러다가 1974년 현재의 해인사 보현암을 짓고 그곳 선원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주석하고 계신다. 스님께서는 이날까지 그저 진실하게 열심히 사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으며, 종교인은 반드시 진실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인과사상을 믿어야 해요. 다시 말해서 착한 일을 하면 착한 업이 자신에게 돌아오고, 나쁜 짓을 하면 그 업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를 알아야 해요. 인과를 믿는 것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아야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윤택하고 고상하게 향상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국민 모두가 그런 삶을 지향해 나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스님께서는 자신을 돌아보아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생활이라고 말씀하시며 출가 수행자의 바람직한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물론 시대가 요청하는 수행자도 있겠지만 출가자라면 무가 뭐라고 해도 첫째 목적은 열심히 공부해서 자아완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출가자들은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열이 있다고 했을 때 무엇 때문에 열이 났는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밝은 눈을 가진 전문 의사가 되어야 해요. 자기 자신이 전문의가 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자기를 바로볼 줄 아는 수행인이 진정한 출가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스님께서는 당신의 상좌들에게도 늘 입버릇처럼 “중은 중답게 살아야 하고, 최저 생활 속에서 최대 노력을 해야 하고,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라”고 가르치신다. 대담을 마치고, 평생을 수좌로서의 삶을 살아오신 스님께서 단결된 비구니의 총집결체인 비구니회관 건립을 앞두고 오늘도 노심초사 애쓰시는 모습을 보며, 이당의 불교가 보다 넓고 깊은 어머니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비구니회관이 하루빨리 건립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