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삶 한암대선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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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 김호성
1991년 02월 108호
스님은 온양 방씨(方氏)로 이름은 중원(重遠)이었다. 아버지는 기순(箕淳), 어머니는 선산 길씨(吉氏)였다.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셨다. 집안의 원 고향은 평안도 맹산군 애전면 풍림리였는데 스님의 조부가 과거를 보려고 화천으로 이사하였다. 아버지는 한학자 이였으며 천주교 신자였다. 그러나 ‘초시(初試)‘라고 불렸다는 것을 보면 크게 출세하지는 못한 듯하다. 형제는 3형제였는데, 스님이 장남이며 막내 동생 역시 스님이었다(법명은 愚一).
속인의 삶은 욕망과 야망에 의해서 이끌려지지만 구도자의 삶은 ‘의심’에 의해서 이끌려진다. 우주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의심이다. 이를 선에서는 화두라고 한다. 그러한 의심을 키워가는 것이 공부(工夫)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님의 경우는 어릴적에 이미 의단(疑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홉 살 때 서당에서 「사략(史略)」이라는 중국의 역사책을 읽을 때였다. 「사략」에는 우주자연이 처음 생기기 이전인 태고 적에 반고 씨(盤古氏)가 있었다고 하였다. 시간에 처음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태초에 반고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다. 종교와 철학의 역사는 이러한 최초의 원인(arche)에 대한 대답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이러한 대답들은 하나의 신화로서 믿어지거나 아니면 아무런 문제거리가 아닌 하나의 사실로서 인식될 따름이다. 그러나 스님은 보통의 사람들과 달랐다. 그 같은 대답의 정당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고 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을까?” 서당의 훈장에게 물어보아도, 온갖 유가(儒家)의 경서(經書)들을 섭렵하여도 그 해답을 얻지 못했다. 마침내 스님은 22세 되던 1897년 금강산을 구경하고 출가하여 행름(行凜)노사를 스승으로 삼았다. 어릴 때 품은 ‘걸림돌’은 세계사 보운회강에서 보조(보조 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을 보고 깨달을 때까지 마치 원수와 함께 지내는 것처럼 그의 마음을 편치 않게 했던 것이다. 이 걸림돌이 그에게는 살아 있는 화두가 된 것이다. 그가 최초로 깨달음을 얻은 「수심결」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진리가 있다고 굳세게 고집하여 불도(佛道)를 구하는 사람은 설사 한량없는 오랜 세월 동안 몸과 팔을 태우고, 뼈와 골수를 부수고, 피를 뽑아 사경(寫經)하고, 잠자지 않고 오래 앉아 있으며,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대장경을 읽는 등 갖가지 고행을 하더라도 스스로를 수고스럽게 할 뿐이다,” 이 초견성(初見性) 이후 스님은 장안사 해은암에 불이 나서 하룻밤 사이에 소진되어 버렸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무상함을 느껴 금강산을 떠나 남행(南行)하게 된다.(스님의 삶과 깨달음에 있어 ‘불’과의 인연은 각별한데가 있다. 앞으로 서술하게 될 최후의 깨달음은 우두암에서 불을 지피다가 얻게 된다.) 그리고 1947년 상원사에서 주석하실 때 법당과 요사채를 태워버린 불을 또 만난다. 이때 스님의 문집인 「일발록(一鉢錄)」도 소실되어 버린다. 이러한 불이 스님에게 무상과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장안사 해은암의 화재 이후 금강산을 떠난 스님은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鏡虛1849~1912)스님을 만난다. 경허스님은 조선 말엽의 거져가는 선풍을 다시금 드높이 일으킨 근세 한국 선의 중흥조였다. 스님은 그런 경허스님의 법을 잇는다. 만공.혜월.침운등 선지식들과는 동문(同門)의 법형제(法兄弟)들이었다. 경허스님 입적 후, 스님은 「경허화상행장」을 짓는다. 경허스님과는 그 성품이 대조적이나 서로 지음(知音)이었으며 사상적으로도 닮은 점이 많이 발견된다. 스님은 경허스님으로부터「금강경(金剛經)」의 한 구절을 듣고 깨닫는다. 마치 홍인(홍인;600~674)과 혜능(혜능;638~713)의 관계와 같이. 다만 그 구절을 달리할 뿐이다. “모습있는 것은 전부 허망한 것이다. 모습있는 것이 모습없는 것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스님은 이 구절을 듣자 안광(眼光)이 홀연히 열리면서 한눈에 우주 전체가 환히 들여다 보였으며,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자기 자신이 아님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의 오도송(悟道頌)은 다음과 같다. “다리 밑에 하늘이 있고 머리 위에 땅이 있네 본래 암팎이나 중간은 없는 것.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봄이여 북산은 말없이 남산을 대하고 있네.” 이 때의 깨달음으로 인해 반고 씨 이전의 면목에 대한 의심이 다시 없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스님은 경허스님을 모시고 대중과 함께 차를 마시며 법담을 나누었다. 먼저 경허스님이 (선요「(禪要)」의 한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경허스님의 이러한 말씀에 아무도 거량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스님만이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瓦牆)이 앞에 있도다”하엿을 뿐이다. 다음날 경허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단계를 넘었다”고 한다. 스님은 30세인 1905년 통도사의 조실로 추대되어 5년 동안 납자들을 지도한다. 그러다가 듯한 바 있어 납자들을 헤쳐버리고 다시 고향인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서 보임(保任)에 힘쓰게 된다. 어느 날 부엌에 앉아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계오(契悟), 구경각(究竟覺)을 얻는다. “부엌에서 불붙이다 별안가 눈밝으니 이를 좇아 예길리 인연따라 분명하네. 누가 나에게 서래의(西來意)를 묻는다면 바위 밑 우물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 “마을 개 짖는 소리에 손님인가 의심하고 산새의 울음소리는 나를 조롱하는 듯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이 하루아침에 세상바람을 쓸어버렸네.” 스님은 이러한 깨달음의 삶을 추구해 오면서도 끝없이 닦음을 계속하는 영원한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50세 되던 1925년 봉은사 조실을 지내다가 오대산으로 들어갈 때 스님이 한 말씀에서도 영원한 구도자로서의 깨달음과 닦음을 계속해 간 스님의 면목을 볼 수 있게 된다.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촌(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 않겠다. 앵무새는 남의 말을 흉내 내는 새이다. 앵무새가 되지 않겠다는 것은 자기 깨달음으로부터 우러나온ㄴ 말을 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남이 알아 주고 남이 높이 떠받들어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자기를 속이지 않고, 자기 소리를 하는 구도자로서 학과 같이 살고자 하였다. 1926년 오대산에 들어간 뒤로 1937년 선학원에서 ‘유교법회’가 열려서 전국의 고승들이 모여서 설법 할 때에 문도들이 두세 차례 참석하시기를 권유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직 ‘문으로 쫓아 들어오지 않는 보배’를 구하고 지키기 위해서 청산(靑山)과 함께 만년(萬年) 묵묵(黙黙)하였을 뿐이었다. 이는 결국 스님의 삶이 깨달음을 향한 또 깨달음과 함께 한 끝없는 여정(旅程), 바로 그것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김호성씨는 보조사상연구소 간사로 있으면서 동국대 박사과정 재학 중에 있고 대전대 철확과와 한국불교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붓다차리타에 나타난 상키야사상 연구」「보조선의 실재론적 경향과 그 극복」「보조의 정토수용에 대한 재고찰」「일본 제국주의의 원종 설치」등의 논문과 번역서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