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노스님은 참, 일을 많이 하셨다. 지금 송광사 효봉 스님 탑전에서 처음 노스님을 뵈었는데, 지금 나의 은사이신 보성 스님은 낫을 들고 풀을 베고 계셨고, 노스님은 전지가위를 들고 화초를 전지하고 계셨다. 나를 데리고 간 학산 스님의 ‘이 손님이 방장스님을 친견하려고 오래 기다렸습니다’ 하는 말씀이 끝나고 노스님을 바라보는 순간, 그것이 인연법인가, 무엇엔가 빨려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흙바닥에서 삼배를 올렸다. 구산 노스님을 그렇게 처음 친견한 날, 오랫동안 출가에 뜻을 두고 있던 나의 운명이 비로소 결정되었고, 그로부터 정확히 한 해 반 뒤, 나는 노스님이 계신 송광사로 출가했다. 서른이 막 넘어서였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긴 지금, 입산자들을 보면, 세상이 정말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걸 느낀다. 요즘 사람들은 컴퓨터처럼 정확히 일은 잘하는 것 같은데, 서른 해 전 우리들이 보였던 정성은 결여되어 있는 걸 많이 느낀다. 아마도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나 아쉬움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절에 들어오면 누구나 그런 것처럼, 동안거 결제 전에 입산을 한 나 또한 스님들 시봉하고 밥 짓고 반찬 만들고, 두달 만에 별좌를 하라고 해서 창고 같은 것을 책임지고 일을 하며 행자시절을 보냈다. 재미있었던 것은 제사가 많은 종갓집 장손이었던 내가 어머니를 도와 솥에 불 때고 전을 부치고 했던 실력을 절에 와서도 발휘한 일이다. 지금도 전 하나는 확실하게 잘 부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가장 뚜렷이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어른스님들께 따뜻한 음식을 드리고 싶어서 두부찌개 같은 것을 하게 되면, 공양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고도 최대한 늦게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들여갔던 일이다. 무엇보다 각오가 확실할 때이기도 했지만, 행자시절은 그만큼 정성을 다했던 순수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막차를 타고 절에 들어오는 손님들을 기다렸던 일이다. 그 시절만 해도 교통사정이 어려울 때라서 순천에서 하루에 세 번만 차가 들어왔는데, 8시 50분 막차를 타고 들어오는 손님들이 있어서 9시 반까지는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던 것이다. 해서 손님이 없으면 안심하고 잠을 자고, 손님이 올라오면 상을 차려 드리고 나서 기다렸다가 상을 치우고 잠에 들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가스불 같은 것이 없던 시절, 석유곤로에 청국장을 보글보글 끓여서 상을 내갔던 일이 지금도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 행자시절을 추억해 보건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구산 노스님에 대한 나의 존경과 노스님께서 내게 내리신 가르침과 사랑이다.
출가자가 되어서 정진하지 못하고 살면 다 부끄러운 일이어서 지금은 오히려 노스님께 누를 끼치는 삶이 되긴 했으나, 선법문을 듣고 출가했을 만큼 참선에 중점을 두었던 나는 행자 때부터 노스님께 화두를 받고 정진했다.
그런 내게 노스님은 말씀하시곤 했다.
“중은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운동부족이요, 둘째는 수면부족이요, 셋째는 영양부족이다.”
노스님은 후학들의 대중생활에 일일이 신경을 쓰며 격려했다. 당시는 행자가 입산하면 반드시 방장스님께 인사를 드렸고 그러고 나면 바로 다음날부터 노스님께서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기셨다. 혹여 예불이라도 한번 빠지면 불참을 정확히 아시고는 불러다가 야단을 치셨을 정도로 각별히 신경을 쓰셨다. 수계 후, 내가 눈병이 나서 한번 아침예불을 걸렀더니, 스님께서 불러 예불 공덕을 말씀하시며 ‘예불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다’ 하시고, ‘신도들도 예불하지 않으면 밥 주지 마라’ 하셨던 기억이 난다. 노스님께 사랑을 많이 받기도 했으나 소임을 보면서 야단도 많이 맞았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했던 것처럼 정답고 가르침이 되었던 꾸짖음들이 지금은 너무도 그리운 추억들이다. 나이 들어 스스로 돌아보건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너무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분위기가 너무 헝크러지지 않았는가, 너무 자유롭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내가 출가한 후 십 년 뒤 노스님께서 입적하실 때까지 노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확실하게 얻은 것은 선지식이라는 개념, 즉 ‘선지식은 근면한 분이구나’ 하는 것과 ‘선지식들은 감사함으로 충만한 분이시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노스님은 철저하게 근면하신 분이었다. 몸과 일이 일체감이 되신 분으로 어느 것 하나도 빠지는 데가 없이 완벽하셨던 노스님께서 보여주신 근면함은 밤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그런 상식적인 부지런함이 아니었다. 완벽함에서 오는 근면함이었다. 완벽하니까 자연스럽게 모든 부분에 깊어지고, 그러한 깊음이 외형적으로는 근면함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삶은 항상 ‘현재’였다. 농사면 농사, 일이면 일, 무엇 하나 모르는 것이 없으셨던 노스님은 밭에 나가 일하시는 때가 많았다. 오후가 되면 반드시 밭엘 나가셨는데, 사중에서 소를 먹이던 그 시절, 쇠똥을 보시면 ‘저것 밭에 놓으면 거름되어 좋은데…’ 하시면서 그냥 지나는 법이 없으셨고, 지나가시다가 밭에 돌이 박힌 것을 보시면 멈추어서 두세 시간 걸려 큰 돌을 빼내시곤 했다.
그리고 노스님은 감사함으로 충만한 선지식이셨다. 십 년을 모시면서 한 번도 ‘왜 음식이 이런가’ 하시는 말씀을 들어본 일이 없다. 때로 내가, ‘스님, 음식이 맛이 없으시지요?’ 하고 여쭈면, ‘아니다… 참, 맛있다’ 하신 분이다. 항상 당신의 마음속에 시주물에 대한 감사함이 철두철미하신 분이었다. ‘중은 흐르는 물도 아껴써야 한다’면서 세숫대야 물도 반을 채우면 야단이 났다. 세수하신 물로 발을 씻고 그 물에 다시 양말을 빠셨던 노스님이다. 물을 아끼는 습성이 몸에 배었던 해군 출신인 나는 지금도 삭발하고 면도하지 않는 한은 거의 물세수를 하지 않는 등 물을 매우 아껴쓰는데, 노스님의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노스님께선 ‘이놈아, 그렇게 하면 그건 중이 아니다’ 란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출가자의 입장에서 늘 자신을 살펴보라는 훈도였을 것이다. 혹 말을 함부로 해서 실수하면 ‘그건 중의 체신이 아니다’ 하고 나무라셨고, 더운 여름에 장삼을 입고 가시는 걸 뵙고 ‘노스님, 더운데 좀 벗으시고 가볍게 입고 가시지요’ 하면, ‘중의 위의로 입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시면서 일상생활에서 부처님 제자로 살아가야 할 처신을 하나하나 일러주셨던 것이다.
정진해서 득력을 하지 못했으니 부끄럽고 할 말이 없으나, 출가해서 행자 때부터 그런 어른을 모시고 살았던 것은 분명 큰 복이었다. 시대의 흐름이 예전과 다르다고 하나 노스님이 계셨던 그 옛날처럼 마음이라도 잡아주고 묶어놓을 수 있는 그런 스승이 드물어 한편 아쉽고, 한편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에 있는 출가자로서 부끄럽다.
한 집안의 장손으로서 출가를 결심한 것이 미안해서 어머니께 출가를 말씀드리려고 앞에 섰을 때 눈물이 먼저 나왔었다. 그런 내게 낯빛 하나 변치 않은 채 내 어머니는 ‘훌륭한 도인이 되거라’ 했다. 그리고 사미계를 받던 날 오셔서는 노스님께 절하며, ‘우리 영진 스님, 큰스님 만들어주세요’ 했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제 출가를 기쁘게 받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란 말을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해드리고 싶었는데, 내 어머니는 자식이 인도순례를 떠나고 이 땅에 없을 때 눈을 감으셨다.
출가한 지 서른 해가 넘은 지금, 나는 전생에도 송광사 중이었음이 분명한, 그리고 노스님을 절절하게 체감하며 다시 중물을 들였던 이곳, 송광사에 있다. 득력을 하지 못한 부끄러운 출가자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