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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원당암 원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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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4년 09월 271호
원당암은 혜암 스님 계실 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게 비질된 마당과, 잡초가 신기할 정도로 완벽하게 제거된 텃밭의 이랑이 마치 사열받고 있는 병사들같이 곧게 뻗은 것까지 깐깐한 옛 주인이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이다.
10년 만의 폭염이라는 호들갑에도 아랑곳 않고, 선방에서 스님들 못지 않게 자리 잡고 안거중인 재가불자들의 정진하는 모습도 여전했다.
변화가 있다면 입구에 큰스님의 사리탑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점과 미소굴 옆 봉황의 등에 안장과 같은 것이 씌워진 점이라고나 할까.
미소굴은 혜암 스님이 주석하시면서 원당암이 시작된 곳. 미소굴 왼편으로 산의 맥이 이어져 달마선원과 미소굴 사이로 길게 내려와 있는데, 그 모양이 뒷산과 어우러져 마치 봉황이 머리를 길게 빼고 있는 형상이라는 설명을 일전에 들은 바 있다. 풍수가의 해석인지 스님들의 해석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봉황이 날개로 선원과 미소굴을 감싸고 있는 듯하다.
마침 원각 스님은 선원에서 정진을 마치고 봉황을 타고 내려 염화실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스님은 하루에 두 번 2시간씩 안거대중과 함께 정진을 하면서 대중들을 챙기고 있었다.
카랑카랑하고 대쪽 같은 혜암 스님과 비슷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원각 스님은 시골 촌로처럼 소박하고 편안하다.
원각 스님은 혜암 스님의 두 번째 상좌이다. 큰스님의 대쪽 같은 성격과는 달리 부드럽고 자애로운 상반된 면이 있어 오히려 스승의 사랑을 받았다. 20년간 선방만 참학하다가 10년 전부터 고견사 주지를 해왔을 뿐이기에 크게 주목받지 않았고 따라서 일반 불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이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큰스님 열반하시자 문도들이 모여 회의한 결과, 큰스님 뜻을 받들어 원당암을 이끌어갈 수 있는 가장 적임자는 원각 스님이라는 점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자신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성격인지라 평소에는 전혀 주목되지 않는 듯 했지만,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주변의 신뢰가 은근히 두텁다.
원당암 감원으로 오신 지 3년이 됐지만 스님의 성품대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원당암을 이끌어오고 있다.
워낙 큰스님께서 깔끔하고 완벽하게 절 운영을 해 오셨기 때문에 가셨어도 그 가풍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고 가타부타 말할 것이 없다고 낮추어서 말씀하시지만, 누구나 책임을 맡게 되면 자신의 스타일을 강조하기 마련인 점을 감안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원당암은 외형상 큰 변화는 없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 들어가면 서서히 변화가 일고 있다. 혜암 스님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추진함은 물론이고, 합리적인 사찰운영을 위해 재정을 공개하고, 포교 및 수행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보다 대중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강구하는 등 시대를 앞서가는 사찰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러나 행정이나 포교적 측면은 원각 스님의 전공(?)이 아닌 것을 척 보면 알 수 있다. 그 분야는 조계종단 포교원의 포교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진각 스님(원주)에게 일임하셨단다.
“그런 일에는 나보다 훨씬 눈이 밝으니까….”
혜암 스님과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혜암 스님 살아 계실 때는 절의 모든 일이 큰스님의 손을 거쳐야 했다. 공양물을 사고 돈이 한 푼 나가는 것부터 불사를 진행하는 일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생전에 축대를 쌓는 불사를 하실 적에는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와 진두지휘 하셨는데 중간 돌이 제대로 놓여지지 않자 위에 놓은 것을 다 들어내고 새로 쌓게 하여 일꾼들이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덕분에 아무리 비가 많이 쏟아져도 축대는 끄떡없다고 한다.
자신에게도 철저했지만 상좌들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으니 상좌 된 입장에서 옆에서 시봉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도 원각 스님만은 안거가 끝나면 바로 스승을 찾아와 시봉을 하였다.
그때에는 나무를 때서 밥을 지었는데 불길이 세차서, 행여 밥물이 넘칠라 치면 날벼락이 떨어졌다. 또한 방을 닦는데도 규칙이 있어, 이미 걸레질 한 곳은 밟지 않고 나와야 했다. 그러려면 입구에서 시작해 다시 입구로 나와야 하는데 마르기 전에 밟으면 또 야단을 맞았다. 뿐만 아니라 문풍지를 발라도 똑바로 발라져야지 삐딱하면 용납하지 않았다. 톱으로 나무 하나를 잘라도 어슷하게 잘 잘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스님은 늘 가르침을 주려 했어요. 토굴에 살면서도 혼자 있는 게 아니고 늘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정진하면서 가르치려고 했어요.”
원각 스님에게는 스승이 그대로 부처님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서로 마음이 안 맞으면 스승을 떠나기도 하고 대들기도 하지만 스승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 교육받았기에 스스로 철저하게 사는 것이 생활에 배었지만, 대를 물려 상좌들에게까지 잔소리를 하지는 못한단다. 잘못이 있어도 따끔하게 야단치지 않고 넌지시 건넨다고. 천성이라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원각 스님은 출가 전부터 성품이 착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착해야 한다는 것이 강박관념이 되어 대학에 붙으면 다른 사람이 떨어져야 하는데 그것을 죄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우연히 약수암에서 “선악을 벗어나야 한다”는 법문을 듣고 속이 후련해지고 정신이 번쩍 들면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혜가가 달마에게서 안심입명 하였듯이 그 법문을 해 주었던 스님에 의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고, 중봉 토굴에서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되었다.
혜암 스님으로부터 직접 초발심자경문 가르침을 받았는데, 해석하면 10년 한 수좌보다 낫다고 칭찬해 주시곤 하였다. 그러나 강원이나 대학엘 가는 것은 원치 않으셨다. 당시 큰스님들이 대체로 그러했는데 공부하면 알음알이만 늘어 장애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후에는 큰스님 생각도 변화가 생기긴 하였지만, 원각 스님은 스승의 뜻대로 바로 선방에서 열심히 참학함으로써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었다. 그 가르침을 다 받들기 어려운 일도 많았을 터인데 그 중에서 상무주암에 거처하시면서 문수암을 지을 때는 30리 산길을 하루 세 번씩 참을 해 나르면서 너무 고생을 해서 지금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때는 모래를 산 아래서 동네 사람들이 등에 지고 날라다 주면 한되당 값을 쳐주었어요.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번 올라오기 힘드니까 일꾼들 밥은 사중스님들이 손수 지어 날라야 하는데 상무주암에서 문수암까지의 거리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나르는 일이 무척 힘들었어요.”
스님은 평생 요령을 피울 줄 모르고 살았다. 천성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선택이기도 했다.
군에 입대했을 때 군모 한쪽에 써놓은 글이 있으니 “쑥맥”이었다. 어른들 말씀대로 바보처럼 쑥맥처럼 다른 것 돌아보지 않고 나는 참선 공부만 하리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고 하셨다.
평생 선방만을 돌다 10년 전부터 혜암 스님 말씀이 있어 고견사 주지를 맡게 되었다. 고찰이긴 하지만 차에서 내려 30분을 걸어가야 하는 시골 절인 고견사에서 스님은 안주정법安住正法 집지교화執持敎化하는 주지라기보다는 일꾼이었다. 일은 많고 사람은 없으니 직접 지게질을 해야 했고, 화장실 똥을 퍼 밭에 주는 일도 해야 했다.
남들은 고생한다며 그러고 어찌 사느냐고 하지만 스님은 그 일이 가장 성향에 맞는 것 같단다. 머리로 생각하는 일보다는 몸으로 뛰는 일이 더 체질에 적합한 것 같다고.
수좌생활 20년 만에 과연 주지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는데, 막상 몸으로 부딪치는 일을 하다보니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아서 좋더란다. 스님은 고견사가 자신에게는 딱맞는 절이라고 말한다. 사실 원당암에 오니 너무 할 일이 없어 미안한 생각까지 든다고.
원각 스님은 순박한 성격 때문인지 시골사람들과도 잘 맞았다.
이렇듯 스님에게는 따스함과 구수함이 있다.
스님이 원당암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 있다면 선방이다.
하안거 동안거가 시작되면 스님은 일단 안거에 들어가는 이들의 화두부터 챙겨준다. 안거가 시작되면 스님도 하루 2시간씩 아침 저녁으로 불자들과 함께 정진에 들어간다. 그리고 화두의 진전 상황을 체크해 주는 일도 스님 몫이다.

매 회당 안거 신청자는 100명을 웃돈다. 수가 점점 늘고 있다. 일년에 두 번 하는 철야용맹정진기도에는 400명에서 500명이 몰려 선착순으로 잘라야 할 판이다.
수행과 명상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는 사회적 현상인 측면도 있다. 해인사 본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여름수련대회 신청자 수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히 4박 5일에 그치는 본사 수련대회에는 젊은이들도 많이 몰린다.
원당암은 이러한 수련대회나 단기 수행체험과 달리 3개월을 스님처럼 안거를 하는 것이기에 스승이 살아 계실 때부터 오래도록 수행의 인연을 쌓은 연세가 든 노보살님과 거사님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런 현상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하셨다. 원당암에도 젊은 불자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잘 이끌고 또 젊은 불자들의 수행풍토를 정착시키는 것이 스님께서 추구하는 새 시대에 맞는 불교일 것이다.
“여기는 그냥 관심이 있는 것과는 달라요. 정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8시간 정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이도 있어요. 사실 그냥 참아가지고는 그게 힘들고 어느 정도 수행의 맛을 알아야 할 수 있지요. 스님들도 사실 그러기 쉽지 않거든.”
때로는 스님과 법거량을 하러 염화실로 찾아오는 곳이 원당암이다.
점점 커져만 가는 수행에 대한 관심을 20년 전부터 수용하기 시작한 혜암 스님의 유교는 이제는 거목이 돼가는 불자들을 잘 다듬고 이끄는 것으로서 이제 원각 스님이 해야 할 소임이니 스님의 어깨가 가볍지 않아 보인다.
스님은 다시 봉황의 등을 미소굴 쪽에서 거슬러 타고 내려서 선방으로 향했다. 스님 뒤를 따라 오르다 안장에서 좀더 앞쪽으로 다가가니 마치 공중을 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봉황은 지금 날아가다 안착한 것일까, 날 준비를 하는 것일까. 봉황도 고삐로 느리고 빠름을 조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