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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른 종교를 배워야 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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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 - 윤영해 1999년 02월 204호
한국사회의 종교적 정황
한국은 다종교 사회다. 다종교 사회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함께 있는 경우를 말한다. 다만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어느 하나의 종교가 압도적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다른 종교는 있으나마나 한 경우라면 다종교사회로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다종교 사회의 충분 조건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저마다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함께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이 있는 종교는 불교와 기독교다. 한국사람 네 명 중에서 한 사람은 불자이고 또 한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게다가 불교와 기독교신자는 한국사회의 종교 인구 가운데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 종교의 뚜렷한 특징은 국가와 사회뿐만 아니라 직장, 학교, 친족, 가정 등 단위 공동체들이 모두 다종교 사회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불자에게 기독교인은 이제 이웃일 뿐만 아니라 직장 동료요, 학교의 급우요, 친지요, 가족이요 심지어 부부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모른다는 것은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경쟁 상대 또는 친구
그렇다면,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서로 어떤 관계인가? 상식적으로 이 둘은 분명 경쟁 상대이다. 70년대 이후 기독교가 내건 최대의 문구는 “신자 배로 불리기 운동”이었다. 늦게 들어온 외래 종교로서 이 운동의 첫째 대상은 예비 종교인인 유소년이나 청소년층이었지만, 기성 세대를 향해서는 비신자보다 이미 종교심이 배어있는 다른 종교의 기성 신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처럼 기독교에게 불교는 당연한 경쟁 상대였다. 한편 자기 신자들을 공격적인 선교를 앞세운 기독교에 계속 빼앗겨 온 불교 또한 기독교를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불교와 기독교는 경쟁 상대가 아니라 동반자요 친구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산업 사회에서 종교인을 세속화시키는 세력은 다른 종고가 아니라 과학적 사고 방식과 합리적 가치관이라는 명분 아래 잘못 이해되는 이성 만능주의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까지 담보하는 물신物神주의와 쾌락적 세속주의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는 기독교가 아니라 이성만능주의이며 물신주의고 세속주의다. 불교도 이와 다르지 않다. 띠라서 불교나 기독교가 경쟁 상대나 적으로 여기고 타파나 굴복을 도모해야 할 상대는 기독교나 불교가 아니라, 이성만능주의나 세속주의라고 하는 공적公職이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탈종교화나 세속화로 내몰리는 것은 경쟁 종교때문이 아니라 이들 공동의 적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두 종교는 동반자요 친구이다.
어쨌든, 경쟁 상대라고 해도 좋고 동반자라고 해도 좋다. 경쟁 상대라면 이기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동반자라 면 아끼고 돕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고서는 이길 수 없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다.

거울에 비찬 나
인간 인식의 대부분은 비교라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우리가 획득한 거의 모든 인식의 결과들, 곧 많다 적다, 크다 작다, 좋다 나쁘다, 왔다 갔다, 이르다 늦다, 빠르다 느리다, 또는 만큼, 처럼, 보다 등의 인식이 모두 비교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새로운 인식은 기존의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곧, 현재 이루어지는 모든 인식은 과거의 인식에 토대를 두고 그것과 비교되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불교의 이해를 위해서 불교만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보다는 기독교를 보색으로 삼아 불교를 보면 불교가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도시 생활만한 사람보다는 산중생활도 해본 사람이 도시 생활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교의 입장에서 기독교는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거울이다. 자신이 자신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거울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 좀더 자신을 잘 비춰볼 수가 있다. 불교에게 기독교는 자기를 견주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타자他者이다.

절체절명의 과제
다종교 사회의 가장 큰 단점은 종교 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불교가 한국 개신교의 공격적 선교때문에 입은 물적, 심적 피해는 적지 않다. 방화, 파괴, 행패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팔만대장경 같은 세계의 문화유산을 순식간에 한줌의 재로 만들어 버리지는 않을까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간의 평화로운 공존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과제이다. 이 과제를 위해서는 어떠한 양보도 있을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종교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예외 없는 합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한 방법으로서 종교간의 대화를 비롯한 수많은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대조를 이룬다. 익히 아는 것처럼 일부는 불교에 아주 적대적이다. 그들은 심지어 불교를 향해 공공연한 파괴를 시도한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불교에 놀랄 만큼 대단히 호의적이다. 예컨대, 한국 개신교선학의 거목인 변선환목사는 불교를 옹호하다가 감리교 신학대 학장, 교수, 목사, 심지어 평신자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그 충격으로 이 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 두 부류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불교에 호의적인 사람은 불교를 이해하는 사람들이고, 불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치고 불교에 적대적인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불교에 적대적인 기독교인들을 우호적으로 만드는 길은 불교를 이해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에게 불교를 이해시키기 위한 첫 걸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불자들이 먼저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기독교인들에게 불교를 이해시킬 수 없다. 다른 종교를 이해하는 정도와 다른 종교인에게 자기 신앙을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은 정비례한다. 한국 불교는 지금까지 이런 작업을 할 겨를이 거의 없었다. 한국만 해도 돈독한 기독교인으로서 불교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획득한 이들이 이미 열 손가락을 넘었다. 반대로 불자들 가운데에서 기독교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시작해도 늦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