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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뜰을 거닐고 있는 소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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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2004년 08월 270호
‘과소비 시대 우리 아이 똑바로 키우기’란 부제가 붙은 <소비에 중독된 아이들>이란 책이 있다. 아이들의 소비행태를 분석해서, 소비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이 책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소비중독이란 말을 꺼내기 위해서다.
현대사회를 여러 말로 표현한다. 정보사회, 고령화사회, 위험사회 등등. 현대사회의 새로운 현상을 표현한 것인데, 소비사회라는 용어로 현대사회의 특징을 짚어내기도 한다. 약간은 다른 표현이지만, 광고사회라는 말도 있다. 외국의 예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미국은 ‘광고천국’으로 불린다. “2억 6천만 명의 미국인은 매일 260만 번의 라디오 광고와 30만 번의 TV광고, 50만 개의 선정용 광고판, 그리고 180억 번의 잡지와 신문광고에 노출된다고 한다.”(최성일, 미국메모랜덤, 살림출판사, 62쪽)
현대사회는 분명 소비중독, 광고중독의 사회이다. 살아가는 것의 외형은 의식주를 소비하는 행위이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지출하는 행위가 소비임에는 틀림없지만, 중독이라는 말이 덧붙여질 때는 퇴행적, 도덕적 이상 징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득 대비 소비의 정도가 상당히 높은 경우이거나, 필요성이 크지 않은데도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다. 과시성 소비일 텐데, 이런 연유로 고가의 명품이 매장을 넓혀간다. 일부러 값을 올려야 소비자가 눈길을 준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카드빚까지 내서라도 사지 않으면 안달이 난다고 한다. 특정한 물건의 소유가 사람의 가치를 재는 척도가 되었으며, 특정그룹에서 소외되거나 배척되지 않는다. 동질성을 물건의 소유 여부를 통해 확인하기도 한다. 《반야심경》에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소비사회에서는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전도된 현상이 아니라, 전도된 현상을 지적하는 것이 전도된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
카드빚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카드빚을 갚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심지어 사람까지 해치는 일도 벌인다. 가정이 파탄나고, 직장까지 떠나는 비극을 맞이한다. 이쯤 되면 소비중독은 만악의 원인으로 지목될 만하다. 광고는 소비를 부추기는, 아니 소비하지 않으면 인격 취급을 하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으니 악의 뿌리가 됨직하다. 그러나 소비와 광고는 자본주의를 매끄럽게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 같은 것이다. 광고학에서는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찬양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생산된 상품을 소비시키기 위해서는 광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해갈 수 없는 과정이다. 이러다보니 광고, 홍보, 판촉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매출액의 5~10%를 차지하는 결과를 보이며, 광고하지 않는 상품은 소비자의 손길이 닿을 수 조차 없다.
광고는 또 광고업이라는 파생산업을 만듦은 물론 광고를 실어나르는 대중매체를 유지, 성장시키는 자양분이다. 구독료보다 광고수입이 훨씬 많은 우리 나라의 신문업에서는 더욱 그렇다. 광고를 유치하기 위해 쓰여지는 기사가 있으며, 기업의 입장에서는, 기업에 불리한 기사가 보도되는 것을 막거나 축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광고를 이용하기도 한다. 광고가 부정과 부패와 거짓을 유지시키는 악역까지 맡는다.
소비, 즉 물질의 충족은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불행의 요인이다. 물질의 충족이란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소비하고 채운들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욕망을 채우기보다는 욕망을 다스리고 여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금욕주의자는 아니다. 쓰되 바르게, 필요에 따라 쓰라는 것이다.
최근 러시아가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국제협약인 교토의정서에 곧 서명한다는 소식이다. 보도에 따르면, 교토의정서(1997년) 발효의 열쇠를 쥐고 있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의 교토의정서 조기 비준을 강력히 시사함으로써 의정서에 반대해 온 조지 부시 미 행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압력이 가중된다는 것.
교토의정서는 선진 38개국이 2012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평균 5.2%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90년 이전보다 더 줄이자는 것이다. 교토의정서는 우리들에게 특히 출가자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준다. 우리의 소비량을 90년의 수준으로 줄일 수는 없을까. 실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95년, 이것도 어렵다면 2000년은 어떨까. 생태경제학자들 가운데는 오래 전에 이미 ‘제로성장’을 제안한 바 있다. 불교 밖의 세상은 환경재앙으로 인한 생명의 공멸을 막고자,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회복하고자 과감하고 새로운 기치를 세우고 있다.
불자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은 출가자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 자동차를 예로 든다면, 스님들도 필요에 의해 자동차를 소유하고 운전하는데, 이에 대해 출가자라면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편리함을 스스로 취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지 않다면 출가하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출가자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출가자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출가자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치를 우리 스스로가 소중히 여기고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이익을 쫓는 중생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우리의 살림살이는 어떠한가. 언제부턴가 자동차는 필수가 되었으며, 토굴이라는 이름의 처소는 호화롭다. 취미생활을 위해 갖췄다고 하는 오디오, 스포츠 장비는 매니아 수준을 넘어 호사 수준이다.
사찰은 어떤가. 큰 시주자가 오면 맨발로 뛰어나가 맞이한다는 비아냥이 들린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것일까. 주지스님으로서,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품위와 체면이 있을 터이니, 속으로야 그럴지 모르지만, 짐짓 삼배를 기다릴 것이다. 물론, 상당히 과장된 것임에 틀림없는 삽화다. 그러나 사찰마다 당연히 있어야 될 신도회가 없는 것을 보면, 일단의 사실을 내포하고 있음직하다. 사찰 살림을 꾸리다보면, 신도들의 시주가 아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닐텐데도 신도회를 조직하고 확대한다는 얘기를 듣기 어렵다. 몇 시주자에 의존하는 것이 관행화되었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보통신도’는 조금은 씁쓸하다.
어느덧 소비주의는 사찰의 일주문을 넘어섰으며, 소비주의라는 유령은 대웅전 앞마당 앞 석탑과 석등 주변을 거닐고 있다. 치울 것이 하나도 없는 빈 마당을 비질하던 노스님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