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절에 들어가게 한 것은 성리학의 대가이며 해동공자로 불렸던 조선의 석학이자 정치가인 이율곡 선생이었다. 열일곱이던 해, 일정 때 발간된 〈오천년 역사〉에서 ‘이율곡 선생이 절에 들어가서 3년 동안 공부했다’는 내용을 읽고는 불현듯 ‘나도 율곡 선생 못지 않게 잘 좀 공부를 해보리라’ 하고는 고향인 장성에서 가까운 백양사로 간 것이 내 출가의 첫발이었다.
한학자인 할아버지 밑에서 공부하던, 한 동네에 사는 이와 함께 백양사로 가니, 당시 종정으로 계셨던 만암 스님께서 반겨주셨다. 속가에서 한문을 읽었다고 하니까, 글까지 지어주면서 좋아하셨는데, 백양사와는 인연이 안되었는지, 같이 갔던 이가 돌아가겠다고 하여 그 혼자 가게 할 수 없어서 집으로 함께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집에 가 있는데도 절에 가고픈 생각이 그치질 않아 다음해 해인사로 들어갔다. 팔만대장경을 모신 절이라는 점과 불교에 대해 잘 아는 용성 스님의 상좌인 변월주 스님이 그곳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것이었다.
때는 초여름, 흰양복을 입은 학인스님들이 밖에서 공을 차고 있는데 스님인지 학생인지 구별이 안 갔다. 1955년 당시는 노장님들이나 승복을 입고 있었지 젊은 스님들은 흰양복을 입고 있었다.
불교 정화 바로 직전이었던 터라 출가하려는 젊은이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본사에서는 ‘암자로 가라’고 했다. 해서 지족암으로 올라가니 참선을 하신 영월 스님께서 내가 한학을 공부한 것을 알고는 ‘나는 참선만 하는 사람이니 백련암으로 가라’고 했다. 그렇게 나의 은사스님이 되신 도원 스님을 만나 뵙고 불교를 공부하면서 그 수승함을 깨닫고는 3년만 있으리라던 생각이 저절로 사라져 예순일곱인 지금까지 절집에 머물러 있다.
지금은 칠불암에 있는 통광 스님께서 돌아가신 일타 스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내가 지족암에 가기 직전 영월 스님께서 석학이었던 옛 강사스님이 지족암을 찾아왔다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꿈이야기가 나왔으니, 아마도 나는 전생에 분명 출가자였을 것이 틀림없다. 백양사에 가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월정 사거리에서 월정사로 들어가는 길을 나무꾼을 따라 들어갔던 꿈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나중에 월정사에 가보니 꿈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꿈에 눈에 익은 이십릿길을 걸어 들어가 법당에 들어가서 가사를 걸치고 책을 한아름 가지고 나오는데, 할아버지께서 ‘너, 그거 가지고 나오면 이 절의 스님이 붙잡아서 중 만든다’ 하시며 말렸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책을 안고 법당을 나오다가 꿈을 깼으니, 경전에 파묻혀 한평생을 산 수행자에의 인연은 내게 필연이었다 할 것이다.
첫눈에 선풍도골의 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은사스님은 평생 참선만 하신 분으로 매사에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셨다. 일상생활에서도 알뜰하게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었다. 스님은 행자인 내게 처음부터 아침저녁으로 참선을 시켰고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외우게 했다. 그리곤 남들이 하는 것처럼 부엌에 들어가 밥 짓고 나물도 장만하고 채소도 가꾸고 나무도 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랬다.
본디 예의범절이 깍듯한 유교집안에서 자랐던 터라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하는 절집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고, 그로 인해 은사스님의 꾸지람을 들었거나 한 적은 없다.
《천수경》을 외우는 데 다른 것은 다 알겠는데, 한자가 없어 의미를 알 수 없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외우기 힘들었다. 그리고 은사스님께서 ‘각성이는 재주가 좋아서 《천수경》을 하루 만에 외웠다’고 대중들 앞에서 칭찬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작은 아버지 모두가 한학자였고, 또 그분들 밑에서 천자문에서부터 《명심보감》·《동몽선습》·《고문진보》·《통감》, 그리고 사서와 삼경을 다 외우고 익혀 출가를 했으니 한문이라면 이미 문리가 나 있던 내게 《반야심경》도 한자로 이해하는 데는 그리 어려워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막상, 매일 《반야심경》을 외우다 보니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의 뜻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히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이 있는데, 왜 부처님께서 없다고 하셨는지, 부처님께서 망언을 하실 리가 없는데 왜 그 도리를 모르겠는지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은사스님께 여쭤봐도, 희랑대에서 평생 《금강경》만 공부하신 노스님께 여쭤봐도 도통 모르겠는 것이었다. 나중엔 은사스님이 용성 스님께서 번역하신 《금강경》을 주어서 읽어보았으나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쩌면, 5개월 남짓 되었던 해인사 백련암에서의 나의 행자시절은 ‘왜, 무안이비설신의인가’라는 화두에 묶여 있었던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 시간들은 불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생짜배기로 출가한 내게 비로소 ‘불교의 요체’에 눈뜨게 하는 예비의 시간들이었고, 경안經眼을 열게 한 단초가 된 세월이기도 했다.
‘무안이비설신의’에 대한 숙제는 칠월 보름에 계를 받으면서 마감한 행자시절이 끝나도록 풀리지 않았고, 이런 나에게 은사스님은 그해 가을, 달성군 유가사 도성암으로 가서 백일 기도를 할 것을 명했다. ‘옴마니반메훔’ 육자주를 지송하라고 명했는데, 불철주야 육자주에 매달렸으나 백일이 다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지 않은가.
다음해 가을, 나는 육자주를 내려 놓고 마음을 텅 비운 채 도성암 벽안당에 홀로 앉아 좌선에 들어갔다. 범어사에서 그곳 강원 조실이신 고봉스님께 《능엄경》을 몇 달 배우다가 도성암으로 돌아와 《능엄경》을 틈틈이 보다가 비로소 앉은 자리였다. 그야말로 허심虛心을 한 것이었는데, 내가 있는 공간도 잊어버리고 시간의 흐름도 잊어버린 그때 나는 비로소 느꼈다.
“아…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의식도 없구나.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자리로구나.”
무안이비설신의에 대한 꽉 뭉쳤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마음이 공한 그 자리에 도달하고 나니 ‘오온이 공함’과 ‘불생불멸 부증불감’, 그리고 팔만대장경의 모두가 이해되었다. 후에 《대승기신론》을 보면서 ‘삼계가 허망하고 거짓되어서 오직 하나의 마음으로 된 것이니, 마음을 떠나면 곧 육진경계가 없다’는 말씀에서 내가 체험해서 깨달은 경계를 확증하고는 무릎을 쳤다.
그때 체험했던 그 공도리空道理에의 절실한 체험은 불교공부는 물론, 성리철학이나 이기철학, 제자백가, 노장학을 꿰뚫어 알게 했다. 그 경안에의 열림은 무엇이든 처음 보면 이해가 되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오십여 년을 출가수행자로 살아오면서 많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공부하는 복을 누렸다. 고봉 스님, 관응 스님, 탄허 스님, 설봉 스님, 운허 스님, 효봉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은 나에게 과분한 스승들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석가모니부처님이 내게 최고의 스승이었으며, 공부하면서 경전에서 만난 문수, 마명, 용수, 무착, 천친보살, 그리고 달마와 육조 대사, 감산, 지욱 대사 등의 선지식은 내가 직접 피부로 느끼고 가슴에 사무쳤던 스승들이었다. 누가, 오늘날 스승이 부재하다 말하는가. 지역이 다르고 고금이 다르다 해도 옛날 불조佛祖들이 모두 스승 아닌가. 또한 경전 모두가 스승 아닌가.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로심력不勞心力이라.’
마음의 본체는 본디 비고 밝은 것이니 비우고 밝혀서 마음을 늘 비추어(관찰하여) 마음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수행으로 삼고 있는 《신심명》에 나오는 글귀다. 허명자조는 방하착方下着, 쓸데없는 생각을 놓아버리는 데서 옴을 잊지 말라.